자동차를 평가하고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판단준거는 무엇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성적인 요소들을 꼽을 것이다. 각종 수치와 사양을 나열해 놓고 비교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자동차가 첨단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으로 다듬어진, 거대한 산업의 피조물인 까닭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차를 선택할 때는 이성보다 감성을 좇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선을 잡아 끄는 디자인, 실내에 둘러진 고급스러운 가죽의 질감, 시동을 거는 순간 울리는 배기음 같은 것들 말이다. 사사로운 숫자나 대단한 첨단 사양 따위 없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면 사람들은 흔쾌히 그 차를 선택한다. 자동차에는 기술 외에도 예술과 헤리티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세라티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차다. 전동화, 첨단 보조 장치 같은 업계의 최신 이슈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기에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운전석에 앉는 순간 빠져드는 마성의 매력을 지녔다.
이번에 시승한 차는 마세라티 패밀리에서도 막내 격인 기블리. 르반떼와 함께 마세라티 브랜드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한 주역이다. 올해로 출시 8년차를 맞이했음에도 꾸준한 발전과 변신을 통해 여전히 마음을 홀리는 요소가 가득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탈리아인들의 미적 감각은 알아줘야 한다. 이제 제법 익숙한 외관이지만, 여전히 기블리의 디자인은 매력적이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뤄진 바디는 가만히 서 있어도 속도감을 전달한다. 1967년 출시된 1세대 기블리가 아름다운 쿠페였던 까닭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럭셔리 세단이 됐지만, 유려한 스타일과 넉넉한 성능을 갖춘 그랜드 투어러의 DNA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분변경을 거치며 외관 상의 변화는 그릴과 범퍼의 디테일 등 일부분에 그쳤지만, 내실은 탄탄해 졌다. 헤드라이트는 풀 LED 타입으로, 매트릭스 기능이 더해졌다. 라이트의 안쪽은 블랙 베젤로 처리되면서 전면부에 무게감을 더해준다.
기블리는 현재 일반 모델과 스포티함을 더한 그란스포트, 우아함과 럭셔리함을 강조한 그란루소 등 3가지 트림으로 판매된다. 시승차는 그 중 그란루소로, 안팎의 디자인에 중후함이 극대화 됐다. 특히 인테리어가 압권이다. 흔히 마세라티의 인테리어에서는 장인이 손수 마감한 부드러운 가죽을 떠올리지만, 그란루소의 실내에서는 그보다 다른 소재들이 돋보인다.
첫째는 우드. 기블리 같은 스포츠 세단에 우드라니? 센터 터널과 도어 트림에 사용된 우드는 너무 고루해 보이지도, 저렴해 보이지도 않는다. 고급스러우면서 세련됐다. 또 두툼한 운전대의 모서리를 따라 두른 우드는 그야말로 절묘하다. 정면에서 볼 때는 보이지 않지만, 옆에서 볼 때만 모습을 드러내 중후함을 더한다. 스티어링 휠 바깥쪽에 우드를 두를 생각을 하다니!
둘째는 실크 내장재다. 기블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차 문을 열면 시트와 도어트림에 화려한 패턴의 직물 마감재가 적용된 모습을 보고 “1억 원이 넘는 차에 직물이라니?”라며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명품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실크 내장재다. 일반 직물보다 탄탄하면서 은은한 광택을 낸다. 이 모두 이탈리아인들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조합이다.
이 화려한 감성품질의 향연(?)에서 조금 깨어나 실내를 둘러보면 인테리어도 제법 현대적으로 개선된 걸 느낄 수 있다. 디스플레이 크기를 키우고 개선된 UI를 적용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전자식 변속 레버는 조작성이 훨씬 개선됐다. 계기판이 풀 디지털 타입이 아닌, 아날로그 속도계와 타코미터가 달린 타입인 건 약간 아쉬운 부분이지만, 레이싱에 뿌리를 둔 브랜드인 만큼 순수한 달리기 감성을 남겨둔 것이라고 합리화 해 보자.
기블리는 전장이 5m에서 조금 모자라고, 휠베이스는 3m에 달한다. 차체 크기로만 본다면 BMW 5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등과 견줄 수 있는 E-세그먼트 대형 세단이다. 그렇지만 상술했다시피 기블리의 본질은 비즈니스 세단이 아닌 그랜드 투어러다. 때문에 차체 크기에 비해 뒷좌석 공간이나 편의성은 다소 부족한 대신 마세라티 특유의 달리기 실력은 오롯이 담았다.
해외에는 580마력을 내는 V8 트윈터보 엔진의 ‘트로페오’ 버전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3.0L V6 트윈터보 엔진이 탑재된 S Q4가 가장 강력한 버전이다. 최고출력은 430마력, 최대토크는 무려 59.2kg.m에 달한다. 페라리에서 직접 개발한 엔진으로, 페라리 V8 모델들에 탑재되는 F154 엔진과 많은 설계를 공유한다. 즉, ’6기통 페라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최근에야 전동화와 터보 기술의 발전으로 이 성능이 대수롭지 않게 보여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페라리가 직접 빚어낸 엔진이 힘을 뿜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다. V형 엔진 특유의 진동 없이 매끄러운 회전질감이 일품인데, 터보 엔진임에도 날카로운 반응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오랫동안 검증된 ZF 8속 자동변속기가 맞물린다.
정차 상태에서 100km/h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7초. 2톤이 넘는 무게를 고려해도 2021년의 기준으로는 그리 빠르진 않다. 하지만 기블리의 주행감각은 그 뒤부터가 ‘본편’이다. 고속에서도 부드럽고 안락하면서, 동시에 탄탄하게 차체를 받쳐 준다. 속도를 높여도 불안감이 없고 입가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카랑카랑한 엔진과 똘똘한 변속기는 부지런히 합을 맞추고, 4륜구동 시스템은 평상시에는 후륜에 100%의 구동력을 전달하다가 상황에 따라 앞으로 최대 50%까지 구동력을 배분한다. 물론 고속에서만 잘 달리는 건 아니다. 5m에 육박하고 2톤이 넘는 거구지만 서스펜션을 스포츠 모드로 바꾸면 예리하게 코너를 돌아 나간다.
막히는 도심에서만 이 차를 탄다면 그 진가를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보다 먼 여정에서 기블리의 달리기 실력과 안팎을 감싼 감성에 집중한다면 전혀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기블리는 ‘그랜드 투어러’가 아닌가? 과거 귀족 집 자제들이 세계 각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는 여행 ‘그랜드 투어’가 그 어원다. 마세라티는, 기블리는 팍팍한 교통정체에 치이는 통근길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근사한 여행이 더 어울린다.
자동차는 공산품이다. 대다수 소비자들이 이성의 영역에서만 머물며 차를 평가하고 선택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성적으로만 본다면 기블리는 편의사양이나 첨단 보조 기능이 다소 부족하고 ‘한 세대 뒤처진’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다소 뒤처졌고, 차선 유지 보조 기능은 온전히 차로를 추종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 했다. 최대 1억 5,000만 원에 이르는 가격도 썩 합리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 한다.
하지만 마세라티는 명품이다. 명품을 구입할 때는 이성이 아닌 감성을 따른다. 우아한 디자인과 수작업으로 마무리된 아름다운 내장재, 세계 최고의 레이싱 명가에서 개발한 매혹적인 엔진, 그 조합이 만들어낸 근사한 주행질감까지. 여기에 100년 역사에 빛나는 마세라티의 헤리티지는 덤이다. 그 감성을 만끽하고 싶다면 잠시 이성의 눈을 가리자. 기블리는 분명 여느 차와는 다른 ‘명품’의 격을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