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국산차 시장의 트렌드는 크게 세 축으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정적인 중산층’의 상징이 된 준대형 세단, 여가를 즐기거나 넉넉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대형 SUV, 그리고 카니발. 조금 과장된 우스갯소리지만, 신형 카니발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다. 사전계약 첫 날 2만 3,006대가 계약돼 국내 신기록을 갈아치우더니, 판매가 본격화된 9월 이후로 매달 1만 대 가량씩 팔리고 있다. 지금 계약해도 4개월은 기다려야 한다니 한국인의 미니밴 사랑이 이렇게 유별났나 싶을 정도다.
정작 미니밴의 고향인 미국에서는 미니밴 수요가 SUV로 대체되면서 인기가 시들하다. 올해 미국 시장의 판매 추이를 봐도 월 1만 대씩 팔리는 미니밴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역시 대체재가 될 법한 대형 SUV의 인기가 꾸준히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카니발의 독보적인 입지는 쉬 흔들리지 않는다. 이 차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카니발 중에서도 주력 모델인 디젤 9인승을 시승하며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출시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따끈따끈한 신차임에도, 워낙 길에서 많이 보인 탓에 이미 디자인은 눈에 익었다. 상당히 과감하게 바뀐 디자인은 선대 모델에 비해 호불호가 갈릴 법도 하지만, 카니발의 압도적인 상품성 때문인지 스타일에 관한 구설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고를 제외하면 전장·전폭·휠베이스 모두 3세대에 비해 늘어났다. 전장은 무려 5,155mm, 휠베이스는 3,090mm에 달한다. 폭은 2m에서 5mm 모자란다. 선대 모델보다 각을 세우고 양감을 강조한 덕에 체감되는 몸집은 늘어난 제원보다 더 크다. A-필러를 검게 처리한 플로팅 루프 스타일을 채택하면서 길어 보이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3세대에 비하면 확연히 화려해 졌는데, 앞모습도 뒷모습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다. 휠 아치에 몰딩을 한 겹 덧대고 차체 하단부를 무광 검정으로 처리해 SUV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C-필러는 반광 크롬으로 처리하고 마름모꼴의 양각 패턴을 넣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사이드 뷰에 포인트를 더해 준다. 심지어는 루프랙도 플로팅 디자인이 적용됐다. 미니밴이 이렇게까지 개성 넘칠 일인가 싶지만, 모든 세그먼트를 집어삼키며 급성장 중인 SUV와도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니 평범한 스타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디자인은 사실 카니발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넓은 공간을 지닌 미니밴을 구입하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더구나 9인승 이상 모델은 카니발이 유일하다. 유일한 국산 경쟁상대였던 코란도 투리스모는 단종됐고, 다른 선택지는 토요타 시에나와 혼다 오딧세이 뿐. 일본차 불매운동의 여파로 구매가 꺼려지는 이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가격 차이를 생각하면 결국 고를 수 있는 건 카니발 뿐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한국 시장에 특화된 구성이다. 해외에서는 가솔린 미니밴이 보편적이지만, 연비에 민감한 국내 시장에서 카니발의 판매는 디젤이 압도적이다. 거기에 9인승을 주력으로 내세워 6인 이상 탑승 시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 주행도 가능하다. 이 모호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2, 3열에는 독립 시트를 적용하고 4열 시트는 싱킹 방식으로 간단히 숨길 수 있다. 법규 상 9인승이지만 일상에서는 6인승으로 운용되는 셈이다.
4열 시트까지 모두 펼치면 2~4열 레그룸이 매우 비좁지만, 4열 시트를 접으면 2·3열은 꽤 넉넉한 공간이 나온다. 성인이 어느 자리에 앉아도 불편하지 않다. 동시에 트렁크 공간이 확보되고 2·3열의 중앙에는 복도가 생겨 6명이 가방을 지고 타도 충분하다. 2열에는 열선 시트가 기본 적용되고, 선택사양으로 전동 및통풍 시트까지 넣을 수 있으니 후열 편의사양도 화려하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건, 작정하고 짐을 싣기에 썩 좋은 구조는 아니라는 점이다. 2·3열 시트는 수평에 가깝게 폴딩이 가능하지만 바닥 아래로 집어넣는 싱킹 시트는 아니다. 때문에 부피가 크거나 긴 짐을 싣는다면 시트 위로 얹을 수밖에 없다. 카니발은 대부분 승용 목적으로 구입하니 별 문제가 아니지만 풀 플랫 폴딩을 지원하는 대형 SUV와 비교했을 때 상황에 따라 공간 활용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오너는 뒷좌석에 앉을 일이 거의 없다. 뒷좌석은 아이들이나 손님의 몫이다. 운전석은 선대 모델과 마찬가지로 승용차 분위기를 한껏 강조했지만, 양감을 한껏 살린 대시보드와 센터 터널, 선 굵은 스티어링 휠이 이 차가 RV임을 드러낸다.
시동을 걸면 디젤 엔진 특유의 소음과 진동이 가느다랗게 들어온다. 이전보다 정숙성은 확실히 개선됐지만, 같은 엔진을 쓰는 SUV들에 비하면 주행 중 소음은 좀 더 선명하게 들린다. 엔진룸과 운전석이 더 가까운 탓일까?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거슬린다.
장르의 특성 상 주행질감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렵다. SUV 옷을 입었지만 여전히 미니밴다운 주행 감각이다. 제법 묵직한 가속감이지만 202마력의 최고출력, 45.0kg.m의 최대토크를 내는 2.2L 디젤 엔진의 힘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속도로에서도 힘이 남는 느낌이다.
승차감은 일반적인 SUV보다 더 무르다. 본래의 역할에 충실한 세팅이다. 물론 무른 세팅이 항상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잔요철은 매끄럽게 걸러내지만 큰 요철을 지날 때는 허둥대기도 한다. 특히 요철을 지난 직후의 잔진동을 처리하는 솜씨가 노련치 못하다. 운전자와 동승자보다는 뒷좌석 승객들이 걱정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멀미가 날 수도 있겠다. 이런 어설픈 승차감도 미니밴의 한계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최근 기아차의 다른 신차들을 생각해보면 확연히 섬세하지 못하다.
애초에 이 차는 운전 자체가 즐겁기보단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정이 즐거운 차다. 주행질감을 세단이나 SUV와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다르다. 기왕이면 기아차가 다른 모델에서 선보였던 세련된 세팅이 카니발에서도 느껴졌으면 더욱 완성도 높은 패밀리 카가 됐으리란 아쉬움이 남는다.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카니발이 성인 6명을 태우고 트렁크 공간까지 충분히 확보한 채 서울에서 부산까지 쾌적하게 내달릴 수 있는 차 중 가장 합리적이고 경쟁력 있는 모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 집에 여러 대의 차를 두는 경우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주말을 보낼 ‘패밀리 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패밀리’가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들로 구성되든, 부모와 성인 자녀로 구성되든 카니발의 압도적인 거주성과 편의성은 대체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누구나 탐내는 패밀리 카 계의 ‘국정 교과서’같은 차다.
카니발의 기본 가격은 3,160만 원이다. 아반떼도 풀옵션이면 3,000만 원을 넘보는 시대에 이렇게 착한 가격이 있나 싶다. 선대 모델에서 부족했던 ADAS가 대폭 강화돼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로 유지 보조 기능은 아예 기본사양으로 탑재된다. 하지만 디젤 엔진을 선택하면 120만 원을 추가해야 한다. 시승차처럼 옵션 욕심을 내면 가격이 빠르게 치솟는다. 9인승 디젤 풀옵션은 4,785만 원이나 된다. 꼭 필요한 선택사양을 잘 고르면 알뜰하게 국민 패밀리 카를 장만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