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보차저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주류가 돼 가는 슈퍼카 시장이지만, 여전히 자연흡기 V12 엔진에 대한 로망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 자연흡기 V12 엔진, 그것도 초경량 차체를 지닌 슈퍼카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있는 차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뒤늦게 낭만에 눈을 뜬, 그리고 많은 돈과 인내심을 지닌 부호들을 위한 새로운 슈퍼카가 곧 출시된다. 바로 고든 머레이 T.50이다.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의 천재적인 포뮬러원(F1) 디자이너 고든 머레이 경이 만든 차다. T.50이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제원을 속속 공개하면서 슈퍼카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고든 머레이 경은 F1 레이스카 개발자이자 디자이너로서 엄청난 명성을 지녔다. 1969년 브라밤 팀을 시작으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맥라렌 팀의 전성기를 이끈 장본인이다. 특히 그의 제안으로 탄생한 맥라렌의 첫 로드카, ‘맥라렌 F1′은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설계와 성능으로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맥라렌 F1은 콜렉터들이 탐내는 클래식 슈퍼카 중 하나다.
맥라렌 F1과 무려 30년 가까운 격차에, 차명도 브랜드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T.50은 맥라렌 F1의 정신적 후계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설계 사상이 그렇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어마어마한 경량화.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경량화를 통해 극단적으로 무게를 줄였다. 전면 윈드실드는 일반 양산차 대비 25% 얇아졌고, 티타늄으로 이뤄진 차체 구조물은 최적화된 결합 설계를 통해 불필요한 무게 증가를 억제했다. 변속기, 페달 박스 등 핵심 부품에서도 조금씩 무게를 덜어냈다.
무엇보다 자동차의 핵심 부품인 엔진, 차체 등의 무게는 놀라울 정도다. 초고속 주행에도 충분한 강성을 유지하는 카본 터브 섀시의 무게는 고작 150kg, 심장인 4.0L V12 자연흡기 엔진의 무게는 180kg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중형 세단에 실리는 2.0L급 4기통 엔진의 무게가 140kg 안팎인 것을 생각하면, 엔진 경량화는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다. 결과적으로 차량의 전체 중량은 980kg로, 웬만한 경차와 비슷한 수준이다.
T.50의 가벼운 차체에 얹히는 파워트레인의 성능은 발군이다. 코스워스에서 제작한 V12 엔진의 최고출력은 663마력(PS), 최대토크는 47.6kgf.m에 달한다. 최대토크의 71%가 2,500rpm부터 뿜어져 나와 일상 주행에도 무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2,500rpm이면 제법 높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엔진의 최대회전수가 1만 2,100rpm이나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속 토크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6속 수동변속기가 조합돼 1톤도 되지 않는 차체를 쏜살처럼 내달리게 만든다.
여기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더해져 50마력의 힘을 보탠다. 1,000마력이 넘는 하이퍼카가 난무하는 시대에 700마력 안팎의 출력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가벼운 무게 덕에 실제 퍼포먼스는 내로라 하는 하이퍼카들과 맞먹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 밖에도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통해 구동하는 전동팬이 차체 하부의 와류를 제거해 레이스카에 준하는 에어로다이내믹을 실현한다. 그야말로 도로 위를 달리는 레이스카인 셈이다.
T.50의 구체적인 디자인이나 제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00대 한정 물량 중 75대가 이미 계약 완료됐다는 게 고든 머레이의 설명이다. 고든 머레이는 계약자 중 40%가 45세 이하의 젊은 부자들이라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 맥라렌 F1을 보고 자란 이들이 그 계승작을 사들이는 것.
T.50은 원래 올 상반기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로 개발이 지연됐다. 월드 프리미어 언베일링은 오는 8월 4일 이뤄지며, 고객 인도는 2022년 1월 시작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V12 자연흡기 경량 하이퍼카를 구입하고 싶다면 250만 달러(한화 약 29억 7,000만 원)의 차량 가격 중 73만 8,000달러(한화 약 8억 8,000만 원)의 계약금을 납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