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이태리의 시골 도로는 유난히 좁은데, 더군다나 나에게는 여지없이 초행길이다. 그리고 내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발의 역할이 중요하다. 매우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아야 된다. 그런데 큰일이다. 발이 흥분한 것인지, 심장이 흥분한 것인지 말을 듣지 않는다. 좀처럼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심장아 나대지 마라!
목소리를 높여 호통쳐 보지만 심장까지 그 소리가 전달이 안 되나 보다. 엔진 사운드가 커서 못 듣는 건지, 들을 마음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손이 쥐고 있는 것은 페라리의 최신 V8 초고성능 미드십 스포츠카 ‘F8 트리뷰토’의 스티어링 휠이다. 강력한 성능과 놀라운 운동성능을 자랑하는 ‘페라리 V8 미드십 스포츠카’의 꼭지점이라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정지에서 100km/h까지 가속하는데 불과 2.9초면 충분하다. 2.9초!!! (이건 흔히 말하는 하이퍼카의 영역 아니었던가?) 이런 미친 성능을 가진 F8 트리뷰토에 앉아있다 보니 비 내리는 낯선 이태리 시골길을 달리는데도 심장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페라리인 것을… 어쩌겠는가? F8 트리뷰토인 것을…
F8 트리뷰토는 태생부터 의미심장함이 묻어 난다. ‘308 GTB’ 이후 ‘328’, ‘348’을 거치면서 비교적 단순한 이름을 사용했던 V8 미드십 페라리들은 ‘F355’에 이르면서 F1 머신에서 가져온 5밸브 시스템을 강조하면서 이름에 그 의미를 담았다. 이후 ‘360’은 페라리의 고향 ‘모데나’를 이름에 붙였고, ‘F430’을 이어 ‘458’에 이르러서는 과감하게 ‘이탈리아’를 이름에 달고 등장했다. 실제로도 458은 리틀 페라리 계보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V8 미드십 스포츠카 최초로 (스페셜 모델과 GT 모델을 제외하고) 강력한 터보 엔진을 장착한 ‘488 GTB’는 의외로 심심한 GTB라는 이름을 달았었는데, 그 후속 모델에 이르러 마침내 페라리 V8 미드십 모델들의 정점을 찍는 이름이 더해진 것이다.
바로 ‘F8 트리뷰토’. 페라리 8기통 모델에 대한 헌정! 페라리 8기통 모델의 눈부신 역사를 기리는 이름이다. 그만큼 놀라운 성능과 기술도 함께 담았다.
재미있는 것은 F8 트리뷰토가 458과 488에 이어 같은 플랫폼에서 만든 3번째 모델이라는 점이다.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최근 기아 모하비가 2번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이런 사례를 가까이서 보여 줬는데, F8 트리뷰토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행사에서 만난 페라리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F8 트리뷰토는 사실 458 이탈리아의 2번째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아닌가? 왜 이렇게 했나?
그의 대답은 한 마디, ‘예측 불가능’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않는 일을 페라리는 할 수 있다는 뜻일까? 페라리는 무얼해도 된다는 뜻일까? 우리가 이런 거 만들 줄 몰랐지? 물론 이미 등장했던 458과 488이 가진 잠재력이 아직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확신에서일 것이다.
나는 거기에 더해서 생각을 해 봤다. 458과 488이 같은 플랫폼의 같은 세대 모델이라 하더라도 488은 터보 엔진을 적용하면서 새로운 기원을 이룬 모델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봤을 때 488을 새로운 기점으로 생각해서 완성도를 한 번 더 높인 모델을 선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488을 첫번째 모델로 보고, 한 번의 페이스리프트를 더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혼자만의 생각이다.
실제로 F8 트리뷰토는 여러 면에서 놀라운 완성도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디자인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만하다. 성능은 V8 로드 스포츠카로서는 꿈의 영역인 2.9초의 순간 가속력을 달성했다. 거기다 승차감과 안정성 역시 또 한번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냈다. ‘트리뷰토’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
이태리의 시골길은 독일의 시골길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폭이 더 좁고, 노면도 훨씬 더 나쁘다. 특히 소형차가 많은 이태리를 생각해보면 소형차가 많아서 길이 좁은 것인지, 길이 좁아서 소형차가 많은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런 이태리의 시골길에서도 F8 트리뷰토는 놀라운 승차감과 안정감을 제공한다. 458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승차감은 488을 지나 F8 트리뷰토에서 완성도가 정점에 다다른 듯하다. 그야말로 매일 타는 페라리가 이제는 현실이다.
노면이 젖었다고 F8 트리뷰토와의 첫 인사를 허투루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젖은 코너에서 엑셀을 조금 깊이 밟으면 뒤가 자연스럽게 흐르지만 이내 자세를 잡아준다. 최신 6.1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사이드 슬립 앵글 컨트롤 시스템(Side Slip Angle Control)과 페라리 다이내믹 인헨서 플러스(FDE+: Ferrari Dynamic Enhancer) 등 초고성능 페라리를 정교하게 컨트롤해 주는 여러 첨단 장비들이 언제 어떻게 개입하는지 조차 모르게 귀신같이 드나드는 모양이다. 488 피스타에 적용됐던 FDE는 FDE+로 업그에이드되면서 CT OFF와 레이스 모드를 비롯해 모든 그립 상황에서 보다 적은 스티어링 동작으로 정교한 핸들링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노면이 미끄러운데도 가속력이 폭발적이다. 쉽게 타이어 슬립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강력한 720마력을 오롯이 뒷바퀴에만 뿜어내는데도 정지에서 100km/h 가속 2.9초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한 그립 컨트롤이 필수일 터다. 슬립의 유혹을 정교하게 떨쳐 내야만 가능한 수치다. 그런 실력이 빗길에서도 발휘된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믿음이 간다.
7,000rpm에서 최고출력 720마력과 3,250rpm에서 최대토크 78.5kg•m를 뿜어내는 이 V8 터보 엔진은 과연 페라리답게 터보레그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부드럽고 강하게 가속한다. 정지에서 100km/h까지는 2.9초, 200km/h까지는 7.8초에 도달하는데 이는 488 GTB 대비 각각 0.1초, 05초가 줄어든 가속력이다. 최고 속도는 340km/h에 이른다. 최고출력 720마력은 488 GTB보다 50마력이 더 높아진 것인데, 이를 위해 커넥팅 로드와 크랭크 샤프트를 개선하고, 플라이휠도 더 가벼운 것으로 대체했다. 페라리의 8기통 엔진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 올해의 엔진상(International Engine of Year award)을 수상했으며, 특히 2018년에는 지난 20년 간 최고의 엔진상(The best engine of the last two decades)까지 수상한 바 있다.
엔진 사운드는 488 GTB보다 더 커졌다. 사실 페라리의 엔진 사운드는 명품이지만, 그 사운드가 자연흡기 고회전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임을 감안하면 터보 엔진으로서는 사운드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페라리는 페라리다워야 한다. 아무리 터보 엔진이라도 모름지기 페라리라면 강력한 엔진 사운드는 필수다. 그래서 488 GTB도 여느 다른 터보 엔진을 장착한 모델에 비해서는 훨씬 더 강렬한 사운드를 제공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 사운드가 더 커졌다. 역시 배기매니폴드와 배기 플랩 등 여러 부분에서 개선이 이뤄진 결과다. 9,000rpm에 육박하는 자연흡기 엔진 사운드와 직접적으로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살짝 더 차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교 대상이 이전의 페라리 자연흡기 엔진일 때나 그렇다는 것이다.
레이스모드가 되면 매일 타도 될 것 같았던 F8 트리뷰토가 성질을 내며 날뛰기 시작한다. 엑셀이 심하게 예민해 지면서 살짝만 건드려도 여지없이 튀어나간다. 사운드는 더 성난 울부짖음을 뱉어낸다. 하지만, 이태리까지 날아왔으니 이번에야 말로 페라리의 레이스 모드를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었던 바람은 비와 함께 쓸려가 버렸다.
그런데 어찌보면 마침 살짝 내리고 있는 비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좀 과감하게 ‘CT OFF’를 선택했다. 기본적으로 자세 제어장치는 작동을 하지만 엔진의 트랙션을 제어하지 않아 쉽게 타이어 슬립을 일으킬 수 있다. 코너에서 시험삼아 조금 과감하게 엑셀을 밟아보면 여지없이 뒤가 살짝 흐른다. 그리고 엑셀에서 힘을 빼면 바로 자세를 잡아준다. 물론 즉각적이고 적절한 카운터스티어는 필수지만 도대체 이 차는 무슨 장비가 어떻게 개입하는지 카운터스티어도 훨씬 매끄럽게 컨트롤해 준다. 이거 정말 재미있다. 사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엑셀을 더 과격하게 밟아야 되고 그만큼 부담이 되기도 할텐데, 오히려 비가 살짝 내려준 덕분에 엑셀을 조금씩만 밟으면서도 슬립을 즐길 수 있어서 부담이 적었다.
시승 중 잠깐 쉬어가는 시간. 언제 어떻게 날뛸지 모르는 맹수에 올라 비 내리는 시골길을 한참을 달렸으니 몸은 쉬라고 말하고 있지만, 눈길을 페라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맹수의 이빨을 가진 앞모습은 확실히 더 잘 정리됐다. 몸을 구부려 녀석과 눈높이를 맞추면 한껏 웅크린 맹수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헤드램프도 458과 488을 거치면서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488 피스타에서는 다소 어색했던 후드 중앙의 S-덕트가 정말 멋지게 바뀐 점이다.
라디에이터를 통과한 공기가 후드 중앙으로 빠져나가면서 더 강한 다운포스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 S-덕트의 근원은 페라리의 F1 머신인데, 이번에는 디자인 개선을 통해 488 피스타보다도 다운포스가 15% 더 증가했다고 한다. 디자인도 멋져지고, 다운포스도 증가하고… F8 트리뷰토는 488 GTB 대비 차체 무게도 40kg 덜어냈다.
옆모습에서는 새롭게 다듬은 커다란 공기 흡입구가 디자인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페라리의 가장 큰 장점인 물 흐르듯 흐르는 라인이 더욱 매력적이다. 루프에서 떨어지는 라인을 감싸는 펜더 위 라인도 예술이다. 한편 매끈한 옆면에 불현듯 툭 튀어나온 도어 손잡이는 옥의 티다. 그마저도 공기의 흐름을 고려하여 디자인 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F355처럼 도어 손잡이를 숨겨서 매끈한 도어를 더 그리워하나 보다.
휠은 전통적인 별 모양 스포크를 하고 있지만 그 별이 너무나 빠르게 회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포크가 기울어진 모습이다. 전통은 살리고, 새로움과 역동성은 더했다.
미스십 스포츠카인 만큼 루프에서 뒤로 떨어지는 곳에 엔진룸이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투명한 커버가 덮여 있다. 이를 페라리는 렉산(Lexan) 스크린이라고 부르는데 옵션이 아니고 기본사양이다. 그런데 커버에 가로로 3개의 칼집이 나있다. 엔진의 열을 신속히 배출하는 기능도 한다. 디자인 적으로는 강력한 터보 엔진을 장착했던 F40에 대한 오마주다. 그리고 헌사다. 이런 오마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설이 있다는 점이 더 부럽다.
지붕을 따라 내려온 공기는 좌우로 나뉘면서 엔진룸에 풍부한 공기를 공급한다. 그리고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강렬한 스포일러가 차체와 한 몸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정도만 하더러도 역대 가장 두드러진 스포일러(?)가 아닐까? 리어 램프는 역시 4개의 동그라미다. 영원히 바뀌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범퍼 아래에는 좌우에 화려한 동그라미 배기팁이 자리한다. 모든 것이 균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디자인은 정말 역대급이다.
실내는 사실 확 더 예뻐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존에 워낙 화려하고 섹시하고 예뻤었는데 살짝 화장을 고쳐서 분위기만 바뀐 정도랄까? 어쨌든 여전히 화려하고 섹시하기는 마친가지다. 동반자석에 7인치 터치스크린 모니터가 추가됐고, 송풍구는 원형으로 바뀌었다. 스티어링 휠은 지름이 작아졌고, 스타일도 더욱 선명해졌다.
앉는 자세는 정말 몸에 꼭 맞다. 단단한 시트가 몸을 확실하게 잡아준다. 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편하다. 손이 닿는 모든 곳의 가죽과 알루미늄이 고급스럽다. 페라리가 이태리에서 만들어지는 건 운명이다.
고속도로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시골길, 산길에서 기대 이상으로 안정적이었던 주행을 감안하면 뻥 뚫린 고속도로는 훨씬 더 편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워낙 강력한 성능 덕에 너무 쉽게 속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굽은 길이라도 나타나면 머리속은 엄청 복잡해 진다. 이 빗속에서 이 속도로 저 코너를 돌아나갈 수 있을까? 200km/h 이상도 우습게 달려 보지만 이 차의 한계는 아직도 저 멀리 있는 듯하다. 너무나 편안하다. 그래서 비가 밉다.
F8 트리뷰토는 타면 탈수록 강력한 힘과 편안함에 초점이 맞춰진다. 폭발적인 720마력을 뒷바퀴에만 전달하면서도 제로백 2.9초를 달성해 내는 놀라운 컨트롤 실력은 운전자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알아서 움직인다. 그러니 매일매일 이 강력함을 편하게 즐길 수 있고,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되면 페라리의 놀라운 핸들링 성능이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서킷의 수 많은 코너들을 강력하게 돌아나가며 그립의 한계가 어디인지 마음껏 느껴보고 싶어진다. 그립의 한계를 벗어날 때 페라리는 어떻게 자세를 잡아 나가는지? 그립의 한계를 벗어날 때 나는 얼마나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아낼 수 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먼 이태리 마라넬로까지 날아왔건만 이번에는 그런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 비가 얼마나 야속하게 느껴질지 독자들은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쉽게도 이태리 마라넬로에서 이뤄진 F8 트리뷰토와의 만남은 짧게 막을 내렸다. 아쉬움이 있어야 또 다음이 있는 거니까 F8 트리뷰토가 정식으로 한국에 들어오면 이번에 못 나눈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눠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