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날, 제주도엔 벌써 유채꽃이 한가득이었다. 서울에선 미세먼지와 아직은 쌀쌀한 바람때문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봄은 와있었다. 제주도에선 전기차가 유독 많이 보인다. 섬이라는 한정적인 지형 특성 덕에 충전 인프라를 비교적 쉽게 구축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여러 렌트카 회사들이 공격적으로 전기차를 홍보한 덕이다. 이렇듯 전기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기에 우리나라에선 제주도만한 곳이 없다.
쉐보레 볼트 EV를 타고 제주도 국제공항에서 시작해 한라산의 1100고지를 지나 서귀포까지 제주도를 가로지르는 왕복 110km의 시승코스는 60kWh 용량의 배터리를 장착해 1회 충전으로 383km의 주행거리까지 소화할 수 있는 볼트EV에게는 무리없는 거뜬한 길이의 코스였다. 다만,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관통하는 이 코스를 이 차가 어떻게 소화할지 궁금했다. 짧은 거리의 도심주행에서 전기자동차의 장점은 이미 다른 전기 자동차들로 충분히 경험을 한 후였다. 경재성, 즉각적인 토크 발생, 내연기관에 비해 극도로 조용한 구동계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러운 주행감각 등 경험 할수록 매력이 많은 물건이었다. 볼트 EV도 그런 전기차 특유의 매력들은 그대로다.
전기차를 처음 운전하면 가장 생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원패달 드라이브다. 원패달, e패달 등 회사마다 부르는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 자동차의 가속 패달 하나로 가속과 회생제동을 이용한 감속의 기능 모두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본개념은 같다. 이 원패달을 이용하여 볼트 EV를 조작하면 조용하고 부드럽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디지털 계기판에 표시되어있는 배터리 충전량을 확인하니 주행 가능거리가 191km로 표시되어 있었다. 110km 거리를 왔다갔다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산길을 올라가다보니 1100고지 휴게소에 다다랐다. 평평하면서도 좌우로 넓게 펼쳐진 산세가 웅장했다. 이 이후로는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내리막에선 원패달 드라이브의 회생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자동차 회사마다 회생제동의 정도를 조절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이다. 어떤 회사는 스티어링 휠 뒤의 패들 시프트를 회생제동 정도를 조정하는 레버로 사용하기도 한다. 볼트 EV는 기어 레버를 D보다 한칸 더 당겨 L모드로 바꾸면 회생제동의 정도를 최대치로 바꾼다. 액셀페달에서 발을 슬쩍 때면 피부에 느껴질 만큼 강한 제동력이 전달된다.
상대적으로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야해서 발이 피곤한 내리막길 코스를 원패달 드라이브를 사용하며 지나가니 다리의 피로도가 현저히 낮아진다. 그런데 여기서 볼트 EV만의 비장의 무기가 등장한다. 바로 Regen on Demand 시스템! 이 시스템은 스티어링 휠 뒤에 있는 왼쪽 패들을 눌러 작동하는데 사실상 버튼식 회생제동으로 생각하면 된다. L모드의 강한 회생제동에 추가적으로 이 Regen 패들을 누르면 마치 브레이크 패달을 밟은 것 처럼 제동력이 한단계 더 증가된다. 물론 실제 브레이크 패달처럼 즉각적으로 차가 서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회사의 회생제동에서 느껴보지 못한 정도의 회생제동량이 발생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회생제동으로 배터리에 충전되는 전기의 양도 추가된다.
그렇게 L모드에서 Regen 패들을 사용해가면서 1100고지로부터 내려오니 서귀포의 바다가 창밖으로 살짝 보이고 그 앞으로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꽃밭 앞에 놓여있는 ‘사진촬영 5000원’ 표지판을 보며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구나…하며 순간 경재적 관념이 돌아왔는지 나도 모르게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주행가능거리 269km. 뭔가 이상했다. 잠깐. 출발하기 전 찍었던 주행 가능 거리 사진엔 분명히 191km라고 찍혀있었다. 내리막에서의 회생제동으로 인해 출발하기 전보다도 주행거리가 거의 80km 가까이 늘어나버린 것이다. 거의 60km나 되는 거리를 운전해 왔는데 배터리의 충전량이 늘어나버린 이 역설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일반적인 도심주행이나 고속도로 주행시엔 계속적인 내리막 코스는 드물기에 이렇게 놀랄 정도의 결과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결과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GM측에서 ‘이 시승회를 통해 여러분이 많은 양의 전기를 스스로 만들게 될 거에요.’라는 말이 그저 우스갯 소리가 아니었다.
주행 시작 전, 왼쪽에 표시되어 있는 191km의 주행 가능 거리
볼트 EV는 GM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사용해 평평한 바닥을 가지고 있고 높게 올린 루프라인, 얇은 1열 시트 디자인 덕에 차체 크기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을 가지고 있다. 또한 편하고 쉽게 사용가능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다른 매력도 많은 차였다. 하지만 그 중 으뜸은 역시나 이 전기 구동계였다. 60kWh의 배터리 용량, 1회 충전으로 383km의 주행거리 확보와 같은 부분은 사실 요새 전기차들 대부분이 갖추고 있는 자격들이다. 그런데 이 회생제동을 통한 효율성 만큼은 볼트 EV가 한 수 위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경험을 하면 할수록 전기자동차에 끌리게 되었다. 볼트 EV도 거기에 한 몫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전기자동차들의 상품성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격 또한 점점 내려갈 것이다. 줄었다고는 해도 정부 지원금과 지자체 지원금도 사실상 구매 의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전기차의 봄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제주도의 봄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와있는지도 모른다.
글, 사진 / 정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