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 도로를 달리는 양산차에서 경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튜닝만 거쳐 일반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레이스카가 있는 반면, 어떤 차들은 온전히 레이스만을 위해 규정에 따라 제작돼 바퀴가 네 개라는 것 외엔 양산차와 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기도 하다.
오직 레이스만을 위해 극한의 설계가 이뤄진 레이스카들은 비록 빠르지만, 안타깝게도 일반도로를 달릴 수 없다. 일반도로를 달리기 위해서는 배기가스나 소음, 안전규정 등 여러 복잡한 규정들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1년에 오직 하루, 350km/h로 질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르망 레이스카라면 더욱이 일반도로를 달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간혹 특별한 행사나 랠리 이벤트가 있을 때라면 레이스카도 도로를 달릴 기회를 얻겠지만, 정식 번호판을 달고 승용차로 인정받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그런데 프랑스 남부의 작은 나라, 모나코에서 전설적인 레이스카가 승용차 번호판을 발급받아 화제다. 포르쉐 91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917은 1970년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를 휩쓸었던 포르쉐의 레이스카다. 르망 최상위 클래스에 출전하는 경주용 차량인 만큼, 공공도로 주행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 상, 승용차로 인정받은 917이 단 두 대 있다.
우선 첫 번째 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 주인은 포르쉐 모터스포츠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베르무트 제조사, ‘마티니&롯시(Martini&Rossi)’의 회장이었던 롯시 백작이다. 그는 1975년 포르쉐 레이스 팀의 917을 한 대 구입했다. 그리고 그 레이스카를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등록했다. 70년대의 느슨한 자동차 등록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 917이 실제로 앨라배마의 도로를 달리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약 40년 뒤 2916년, 모나코 공국에 거주하는 클라우디오 로다로는 섀시번호 #037번 포르쉐 917 레이스카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한다. 바로 자신의 917을 승용차로 타고 다니기로 한 것. 21세기의 도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모나코 공국은 매우 작은 도시국가로, 자체적으로 신차의 구조나 안전성을 검증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일반도로용 승용차로 등록된 기록이 있다면 어떤 차든 등록이 가능하다. 로다로 씨가 917의 번호판 발급을 시도한 것도 이러한 제도의 빈틈을 이용한 것.
그는 자신의 917이 1975년 롯시 경이 구입한 차량과 같은 구조와 제원을 지닌 차량임을 증명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와 증명서를 제출했다. 특히 로다로의 917-037은 포르쉐 공장에서 완성된 것이 아닌, 미완성 상태의 섀시가 독일 코치빌더 바우르(Baur)에 판매됐다가 미국의 포르쉐 전문 레이싱 팀에 재판매된 뒤 2000년대 초 완성된, 매우 복잡한 이력을 지녔다. 때문에 인증 작업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됐다고.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포르쉐도 기념비적인 레이스카의 일반도로 주행을 위해 인증 작업에 참여했다. 포르쉐는 로다로의 917이 단 한 번도 레이스에 출전하지 않아 사고 등으로 인한 개조가 전혀 없으며, 1975년에 판매된 롯시 경의 917과 약 95% 동일한 차량이라는 것을 확인해줬다.
일련의 인증작업에는 2개월의 시간이 소요됐으며, 결국 로다로는 자신의 917에 모나코 공국의 번호판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로다로의 917 레이스카는 1970년대 기준으로 무지막지한 600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며, 최고속도는 354km/h에 달한다. 게다가 온전히 경주용으로 개발된 차량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머플러따윈 없다. 그의 917이 속도를 줄일 때면 시뻘건 불꽃이 배기구로 뿜어져나오는 걸 볼 수 있다.
혹시나 모나코 공국을 찾을 일이 있다면, 굉음을 내는 레이스카가 몬테 카를로의 시가지를 지나지는 않는 지, 반드시 주변을 둘러볼 것. 모나코에는 수백 대의 최고급 스포츠카와 하이퍼카들이 즐비하지만, 로다로씨의 917은 전 세계에 단 한 대 뿐인 아주 특별한 승용차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