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천재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동차 본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번호판조차 붙이기를 꺼렸다. 새 차를 사고 6개월 안에 번호판을 붙이면 되는 캘리포니아의 법을 이용해 그는 리스회사와 6개월마다 새 차를 받기로 계약한다. 그런데 그가 타는 차는 항상 메르세데스-벤츠의 SL55AMG였다. 주변인들은 그가 “보안상 이유와 미적인 이유 때문에 번호판을 붙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다. 잡스는 2007년식 벤츠 SL부터 시작해 6개월마다 SL클래스를 새차로 갈아탔다. 당시는 벤츠 SL클래스의 절반이 미국에서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부자들은 너도나도 SL클래스를 타기 시작했다.
SL클래스는 부자들에게 만족스런 차였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브랜드는 물론이고 슈퍼카에 가까운 강력한 성능을 내면서도 날마다 타고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당시의 SL클래스는 하드탑 컨버터블을 장착해 쿠페와 컨버터블의 감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또, 6세대에선 알루미늄 차체를 이용했고 2008년에는 AMG를 추가했다. 더 가벼워진 차체로 더 잘 달리는 데일리카를 만들어냈다.
캘리포니아의 이야기를 전하자니 마치 SL클래스가 부자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SL클래스는 모터스포츠를 위해 벤츠가 만들어낸 독특한 차다. 1954년 뉴욕 오토쇼에서 첫 등장 하며 어쩔 수 없이 ‘걸윙도어’라는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해낸다. 이후 모터스포츠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했고 최근에 들어서는 F1 경기에 ‘세이프티 카’로 등장하며 수많은 머신의 가장 앞에 서 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던 메르세데스-벤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모터 스포츠에 다시 복귀하길 원했다. 1952년 벤츠는 모터 스포츠를 위해 300SL를 만든다. 르망 24시간 레이스, 뉘르부르크링 기념 스포츠 카 그랑프리, 카레라 파나메리카나 등의 경기에서 우승하며 모터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이를 본 미국 뉴욕의 벤츠 수입업자 맥스 호프만이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300SL를 내놓자고 설득하고 1954년 뉴욕 오토쇼에서 데뷔한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300SL은 섀시 구조상 강성이 확보되지 않아 일반적인 도어를 장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낸 것이 문짝을 하늘 위로 들어올리는 ‘걸윙도어’다. 또, 양산차 최초로 보쉬의 연료 직분사 기술을 채용하는 등 실험과 도전정신이 강한 차로 자리 잡는다.
2세대 SL은 더욱 크고 강력한 직렬 6기통 엔진을 얹는다. 쿠페와 로드스터로 출시된 이 차는 하드톱 컨버터블을 장착해 ‘파고다(Pagoda)’라는 별명을 얻는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총 4만8912대가 생산됐고 모델 라인업으로는 230, 250, 280 SL 등이 포함됐다. 미국에서 첫 선을 보인 SL클래스는 할리우드의 배우들이 선택하면서 인기를 끌게 된다.
1970년대는 자동차 역사에서 안전을 중요시한 때다. 안전벨트와 에어백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메르세데스-벤츠는 SL클래스의 A필러 강성을 높였다. 천정이 없는 오픈카에서 A필러는 차량의 전복시 탑승자의 안전을 지켜주는 안전 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971년 SL클래스는 처음으로 8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무려 18년 동안이나 판매된다. 메르세데스-벤츠에서 단일 모델로는 G클래스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 생산된 차다. 1989년 마지막 생산까지 무려 23만7287대가 제작됐다.
4세대로 거듭난 SL은 역시 안전을 중요시했다. 3세대에서 A필러를 강화했다면 4세대에서는 좌석 뒤의 롤 바를 설치했다. 차량의 전복이 감지되면 0.3초 만에 롤 바가 튀어나와 A필러와 함께 운전자를 보호한다. 또, 이를 완벽하기 구현하기 위해 안전벨트의 어깨 부분 고정고리를 마그네슘 프레임으로 의자 뒷부분에 고정했다. 엔진도 강화됐다. 1993년에는 394마력의 12기통 600SL이 추가돼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5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약 20만대가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다.
가장 길에서 많이 만난 SL이자 최근 할리우드 유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모델이다. 가장 큰 특징은 하드톱 컨버터블을 구현한 것. 바리오-루프를 통해 오픈카의 스타일과 쿠페의 안락함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버튼을 눌러 16초 만에 쿠페에서 컨버터블로 변신한다. 2003년 SL500은 ESP, ABC 액티브 서스펜션과 함께 전자식 브레이크가 장착된 최초의 차로 기록된다. 또, 2008년에는 AMG의 6.3ℓ 자연흡기식 엔진을 장착한 SL63AMG가 출시된다. 7단 멀티클러치 변속기가 탑재됐고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h까지 불과 4.6초 만에 주파했다.
2012년 1월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공개된 벤츠 SL클래스 6세대 모델은 7년 만에 풀체인지됐다. 기존 모델이 무려 10년 넘게 유지됐던 것을 고려하면 무척 빠른 변화다. 길어진 보닛과 근육질의 보디 라인을 가져 강력한 로드스터의 외형을 갖췄다. 카본 소재의 트렁크 리드와 알루미늄 보디를 채택해 경량화에 신경 썼다. SL63AMG의 차체 무게는 256㎏으로 기존 모델 대비 무려 110㎏을 감량했다. 또한, 비틀림 강성도 20% 향상시켜 주행과 안전을 동시에 잡았으며 연료 효율성도 강화했다. 벤츠가 SL클래스에서 꾸준히 신경 썼던 바리오-루프는 ‘매직 스카이 컨트롤 파노라마 바리오-루프’를 채택해 버튼 하나로 천장 유리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파생 모델로 벤츠 SL의 걸윙도어를 재해석한 SLS AMG도 출시됐다.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총 중량이 1700㎏에 불과하며 초경량 디자인과 고강도 소재를 사용했다. 또한, 경주용 차량에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더블디클러치 변속기가 장착돼 더욱 빠른 변속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