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도 버텼다. 2008년 11월 ‘라세티 프리미어’로 출시된 쉐보레 크루즈가 8년 2개월 만에 2세대로 변신했다. 지난 해 스파크로 경차 1위를 탈환하고 말리부로 중형 세단에 파란을 불러왔던 만큼 신형 크루즈에 거는 기대도 컸다. 그렇기 때문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신형 크루즈는 높은 기대감에 못 미쳤다.
지난 해 중형 세단 열풍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준중형 세단 시장은 상당한 규모다. 세그먼트 점유율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 아반떼를 필두로 연간 판매량이 15만 대에 육박한다. 적잖은 생애 첫 차 수요가 소형 SUV로 옮겨 갔지만, 중형 세단 시장이 제품경쟁력 부재로 SUV 등에 점유율을 빼앗겼던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준중형 세단 역시 상품성만 받쳐준다면 향후 더 큰 규모로 성장할 잠재력은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서 크루즈의 어깨는 무겁다. 중형 세단과는 상황이 다르다. 쏘나타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얻는 사이 SM6와 말리부가 개성있는 디자인과 파워트레인으로 승부수를 건 반면, 준중형 세단에서는 아반떼가 독보적이다. 한참 뒤에 있는 2인자 K3조차 지난 해 크루즈보다 3배 넘게 많이 팔렸다.
준중형 시장은 경제성과 편의성, 완성도가 치밀하게 교차하는 지점이다. 생애 첫 차나 패밀리 카로서의 역할을 위해 충분히 넓어야 하고, 동시에 부담스럽지 않은 유지비를 지녀야 하며, 경차나 소형차보다 잘 나가면서 저렴하지 않은 상품성까지 요구된다. 게다가 청년층을 유혹할 수 있도록 개성있으면서도 중장년층이 타도 부담스럽지 않아야 한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을 하나씩 따져가며 크루즈가 탄생했다. 적어도 외관은 합격점이다. 정석적인 3박스 세단의 비례였던 구형과 달리 신형은 A필러를 거의 휠하우스 지점까지 앞으로 당겼다. 동시에 C필러는 트렁크 끝까지 밀어내 실내공간을 넓히면서 모던한 비례가 됐다.
전장*전폭*전고는 4,665*1,805*1,465(mm)에 휠베이스는 2,700mm로 아반떼와 비교하자면 휠베이스는 같지만 전장은 95mm나 길고 전폭은 5mm, 전고는 25mm가 더 길다. 동급 중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하지만 중형 세단에 비하자면 한참 작아 ‘중형급까지 경쟁한다’는 말은 다소 민망하다.
여기에 새로운 쉐보레 패밀리 룩을 덧씌웠다. 작년 출시된 말리부와 빼닮았지만 헤드라이트 면적이 더 커서 당돌한 눈매다. 헤드라이트에는 LED 주간주행등이 삽입돼 있지만 HID는 적용되지 않는다.
후면부도 앞서 출시된 말리부와 비슷한 스타일을 이어간다. ‘ㄴ’자 형태의 라이트 그래픽이 좌우 각 2개씩 나열돼 있으며, 독특하게 한 쪽에는 후방 안개등이, 한 쪽에는 후진등이 삽입돼 일견 유럽차스러운 느낌을 준다.
범퍼와 라이트의 형상은 조화롭지만 최상위 모델에서도 LED 테일램프가 적용되지 않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준중형 세단 중 LED 테일램프가 적용되지 않는 것은 크루즈가 유일하다.
실내 역시 쉐보레의 인테리어 디자인 컨셉인 ‘듀얼 콕핏’을 충실히 따른다. 센터페시아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 형태로 대쉬보드가 구성되며, 사용빈도가 높은 오디오와 공조기 조작 버튼은 터치 스크린에 집어넣지 않고 깔끔하게 나열했다.
큼직한 버튼들은 운전 중에도 조작하기가 간편하고 직관적이다. 세부적인 조작 기능은 터치 스크린을 활용하면 되고 아이폰 사용자라면 애플 카플레이 사용도 용이하다. 필자의 경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사용해 확인해 보지 못했다.
장점부터 꼽아 보자면 우선은 쾌적한 실내다. 불필요한 디테일을 걷어내고 시원스럽게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개해 시각적으로 넓어보이는 효과를 준다. 매우 낮고 안정된 시트 포지션도 반갑다. 덕분에 앉은 키가 큰 필자도 머리가 전혀 닿지 않는다. 현대 아반떼의 경우 썬루프가 있는 모델은 머리가 닿았다.
하지만 직접 손을 대 보니 빠르게 실망감이 찾아온다. 대쉬보드와 도어트림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테리어 소재가 저렴한 경질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것. 대쉬보드 상단이나 도어트림 상단, 센터 터널 주변까지 모두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이뤄져 2,000만 원대 후반의 준중형 차가 아닌 경차나 소형차를 탄 기분이다.
수납공간 부족도 지적을 피할 수 없다. 2개의 컵홀더 외에 센터페시아 하단 수납공간이 있지만 USB와 AUX 단자, 시거잭 등이 위치하고 있어 수납 용도로서 활용성이 많이 떨어진다. 센터 콘솔 역시 크기가 많이 작다는 생각이다. 컵홀더에 컵을 잡아주는 기능이 없어 직경이 작은 캔이나 컵을 꽂아두기에 불안한 것도 흠이다.
무엇보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세로로 꽂는 형태의 스마트폰 무선충전기다. 필자의 갤럭시 S7 엣지는 꽉 끼어서 삽입이 어려웠고 그나마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배치지만 애당초 스마트폰이 들어가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안드로이드든 아이폰이든 스마트폰 크기는 날로 커져 가는데, 트렌드에 뒤처진 느낌이다.
그 밖에도 통풍 시트가 없다든지 하는 크고 작은 불만이 있지만, 차를 평가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니 판단은 소비자에게 맡긴다. 결국 편의사양은 말 그대로 ‘옵션’이니 말이다.
크루즈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주행 성능이다. 1세대 크루즈부터 쉐보레는 꾸준히 우수한 주행감각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앞세웠다. 이번에는 파워트레인을 한 가지로 단일화하면서 기본기에 충실하겠다는 모습이다.
파워트레인은 신형 1.4L 터보 엔진과 6속 자동변속기의 조합이다. 최고출력은 153마력, 최대토크는 24.5kg.m을 발휘해 동급 기본 모델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다. 배기량이 같은 현대 i30 1.4 터보와 비교하자면 15마력이나 높은 것으로 경쾌한 주행성능에 집중했음이 잘 드러난다.
일상 주행의 영역에서는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가뿐한 움직임을 보인다. 최대토크가 2,400~3,600rpm의 실용영역에서 발휘되는 덕분이다. 정차상태에서 출발 시 초반에는 약간의 터보래그가 느껴지지만 조금만 회전수를 높이면 적어도 답답할 걱정은 없다.
특히 변속기와의 궁합이 좋은 편이다. 국산 젠3 변속기에 대한 우려는 항상 제기되지만 이제 적어도 성능적인 부족함은 없다. 업시프트도 다운시프트도 빠르고 적극적이며 정확하다. 일상에서의 부드러움과 스포츠 주행에서의 명쾌함이 잘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환영할 것은 마침내! 드디어! 토글시프트로부터 해방됐다는 점이다! 변속기 레버 위의 불편하고 해괴한 토글 버튼 대신 팁트로닉 타입이 적용됐다. 물론 크루즈는 구형에도 팁트로닉이 적용돼 있었고, 여전히 패들시프트는 없지만, 그래도 북미형의 토글시프트가 팁트로닉으로 대체된 점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포츠 주행에 너무나도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조금 속도를 내 보면 차의 움직임이 가뿐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치열한 경량화를 거쳐 터보 엔진임에도 공차중량이 1,250kg로 억제된 덕이다. 구형보다 100kg 이상 가벼워진 것이다. 단순한 출력 상승으로는 이렇게 경쾌한 움직임을 구현할 수 없다.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 토션빔 타입의 서스펜션은 일상주행에서는 지나치다 싶게 단단하다. 선택사양인 18인치 알로이휠까지 적용되면 필자 기준에서는 다소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 스트로크가 짧아 불규칙한 노면이나 요철에서는 다소 신경질적이다.
하지만 시내 주행에서의 아쉬움은 산길에서 무기가 돼 돌아온다. 코너에서는 힘껏 바깥쪽을 지탱해 주고 속도를 높여도 시종일관 안정적이다. 어느 정도의 롤링은 허용하지만 불안정함이 아닌 완숙함이 느껴지는 세팅이다.
토션빔의 한계로 노면이 거친 코너에서는 후륜의 접지력이 약간 흔들리지만 상당히 섬세하게 세팅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치지 않는 파워트레인과 다운힐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브레이크까지 모든 부분이 일체감을 준다.
특히나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스티어링 감각이다. 인위적이고 불편한 무게감 없이 적당히 가볍게 돌아주면서도 허접하게 휘청이지 않는다. R-EPS 덕이라고 해야 할까? 노면 리스폰스가 스티어링 휠에 뚜렷하게, 하지만 불쾌하지 않게 전달돼 운전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조향 감각만큼은 어떤 경쟁차도 따라오지 못한다.
공인연비는 복합 13.5km/L. 시승 간에는 12~13km/L를 오갔다. 배기량이 작다보니 정체구간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힘을 많이 쓰면 제법 먹성이 좋다. 어쨌거나 작은 배기량은 연비나 세금 등 유지비 면에서는 우수한 무기가 된다.
순전히 종합적인 상품성만 놓고 보자면 크루즈가 경쟁 모델-특히 아반떼에 비해 열세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편의사양이나 인테리어 소재의 열세는 특유의 뛰어난 주행감각으로 충분히 만회가 가능한 수준이다. 아반떼 일색의 시장에서 ‘개성’이라는 부분을 생각하더라도 크루즈가 새삼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고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납득하기 어려운 가격정책이다. 소위 ‘깡통’이라 불리는 기본형 트림의 가격은 자그마치 1,890만 원. 시승차는 최상위 트림인 LTZ 디럭스에 모든 선택사양을 적용해 2,848만 원까지 가격이 뛴다. 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3,000만 원이 넘는다.
라이벌인 아반떼가 가성비 좋은 1,670만 원의 밸류 플러스 트림을 운영하고 최상위 트림에 긴급제동과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HID 헤드라이트와 LED 테일램프 등 온갖 옵션을 다 집어넣어도 2,620만 원(할인 제외)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격만 놓고 보자면 204마력을 내는 고성능 버전, 아반떼 스포츠와 비교될 정도인데, 이 마저도 풀 옵션 기준 아반떼 스포츠가 100만 원 가량 저렴하다.
‘제품이 좋아서 더 비싸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명백하다. 상술한 편의사양이나 소재의 원가절감은 차라리 양반이다. 쉐보레의 자랑인 안전사양을 비교해도 아반떼가 7개의 어드밴스드 에어백을 장착한 것에 비해 크루즈는 디파워드 에어백 6개에 그친다. 10-에어백을 강조하는 북미 사양과는 대조적이다.
동급 모델 대비 부족한 사양과 북미보다 떨어지는 안전성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소비자는 많지 않다. 북미에서도 원래 비싼 차다? 아반떼도 북미 판매가가 한국보다 비싸진 지 오래다. 신형 크루즈는 국내생산이 갖는 비용절감과 현지화의 장점 모두를 상실했다고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말로만 ‘좋아졌다’를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점유율이 올라갈 수록 맹목적인 브랜드 충성도로 제품을 성공으로 이끌기는 힘들어진다. 되려 소비자들은 점유율이 늘어날 수록 냉정하고 공정해 진다. 내수 점유율 10%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경쟁력이 필요하다.
크루즈가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자명하지만 오히려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다. 8년 전 처음 크루즈가 등장했을 때와 시장은 많이 달라졌고, 경쟁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열세를 만회할 무기들을 갖췄다. 신모델에 대한 오랜 기다림과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지 않기 위해서는 이미 냉랭해진 분위기를 반전시킬 단호한 변화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