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라는 브랜드를 이야기할 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키워드는 ‘안전’이다. 그 악명높은 스몰 오버랩 테스트가 처음 시행됐을 때도 다른 브랜드들을 비웃듯 구형 모델로 테스트를 통과하며 경쟁사들을 경악시켰을 정도로, 볼보에게 안전은 빼놓을 수 없는 아이덴티티다.
하지만 이제 볼보를 ‘안전’으로만 정의하는 시대는 지났다. 지난 해 한국에도 XC90과 S90을 잇달아 선보이며 스칸디나비안 럭셔리를 선보인 볼보는, 더 나아가 퍼포먼스의 영역까지 그 세력을 넓히고자 한다. 폴스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폴스타(Polestar)’는 원래 볼보의 튜너이자 레이싱 팀으로 시작된 회사지만 2015년 퍼포먼스 튜닝 부문이 볼보에 인수돼 현재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볼보를 만드는 회사로 거듭났다. 과거 850 에스테이트를 투어링카 레이스에 출전시키며 퍼포먼스를 과시하고, 현재까지도 호주, 스웨덴, 미국 등 세계 각지의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하는 볼보가 이제는 도로에서도 빠른 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폴스타의 첫 작품, S60과 V60 폴스타를 출시 전 짧게나마 만나봤다. 그것도 퍼포먼스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서킷에서 만나봤으니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이전에도 볼보는 S60R 등 고성능 모델을 종종 선보이며 소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1995년 850 T-5 R의 출시로부터 꾸준히 고성능 버전을 개발해 왔다. 볼보의 경영 악화로 한동안 고성능 모델의 제작도 주춤하다가 재기와 함께 고성능 라인업의 강화도 본격화된 것.
폴스타 역시도 그러한 볼보 퍼포먼스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모델이다. 그런 관점에서 폴스타의 아이덴티티를 꼽자면 매일 탈 수 있는 ‘데일리 퍼포먼스 카’를 추구한다는 것. 과격하지 않은 디자인과 거칠지 않은 퍼포먼스가 그러한 폴스타의 특징을 대변한다.
앞서 국내에 R-디자인을 선보인 바 있기 때문에 폴스타 역시도 일견 R-디자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가령 에어로다이내믹 성능이 극대화된 프론트 스플리터와 리어 디퓨저는 폴스타의 풍부한 모터스포츠 경험에서 비롯된 파츠들이다.
앞뒤로 두른 에어로 파츠와 20인치 전용 알로이 휠, 폴스타의 상징적인 푸른 뱃지를 제외하면 일반 S60이나 V60과 별 다를 바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폴스타는 S60, V60을 퍼포먼스 카로 만들기 위해 차 안팎을 41군데나 손봤다.
특히 파워트레인의 변화가 인상깊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폴스타는 3.0L V6 터보 엔진을 탑재해 35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지만, 2017년형부터는 폴스타도 드라이브-e에 동참한다. 2.0L 직렬4기통 트윈차저 엔진은 최고출력 367마력, 최대토크 47.9kg.m의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다. 381마력을 내는 메르세데스-AMG의 엔진에 이어 양산 2.0L 엔진으로는 두 번째로 강력한 것이다.
이 엔진은 기존 306마력을 내던 T6 엔진에서 터보차저와 인터쿨러 등을 업그레이드하고 커넥팅 로드, 연료펌프, 캠샤프트 등 엔진 내부의 세세한 성능 개선이 이뤄진 버전이다. 다기통 엔진 특유의 회전질감이나 소위 ‘감성 성능’은 포기해야 하지만, 동일한 성능과 내구성이 보장된다면 당연히 더 작고 가벼운 엔진 쪽이 퍼포먼스든 유지부담이든 유리하다.
여기에 변속기는 아이신제 8속 자동변속기가 조합되며, 전용 변속기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보다 적극적인 변속을 구현한다. 변속 때마다 맹렬한 사운드를 내뿜는 전용 배기 시스템 역시 매력적이다.
스웨덴 하면 ‘이케아’나 복지 등이 떠오르지만, 스웨덴의 공업기술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S60과 V60 폴스타에도 이런 스웨덴 기술력이 숨어있다. 가령 세계 최고의 서스펜션 시스템으로 잘 알려진 올린즈 사의 조절식 서스펜션이 장착되며, 전자제어식 4륜구동 시스템은 미국산이지만 스웨덴에서 발명된 할덱스 방식을 채택한다. 전용 구동력 배분 소프트웨어 덕분에 주행 감각은 일반 AWD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그 실력을 어서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빡빡한 스케줄로 여러 대의 볼보 차량을 연달아 시승하는 프로그램 상 폴스타는 S60과 V60을 각각 한 번씩 타볼 수 있었고, 공교롭게도 일반 S60도 마련돼 일반 모델과의 비교도 가능했다.
운전석에 앉으면 의외로 평범한 S60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곳곳에 힘을 준 티가 난다. 우선 가죽 소재가 눈에 띈다. 거친 질감의 누벅 가죽을 스티어링 휠과 시트에 둘렀다. 스포츠 주행 시 운전자의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하고 스티어링 휠 그립감을 높이기 위함이라는 설명이다. 폴스타의 상징인 파란색 스티치도 분위기를 바꿔준다.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시트의 사이드 볼스터와 메탈 재질의 전용 페달, 카본 소재로 마감된 센터페시아 등 곳곳에서 고성능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더 티를 내줬어도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크리스탈 소재로 멋을 부린 전용 시프트 노브. 운전을 하면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부분들에 매력을 더했다.
“볼보가 스포티해봤자 얼마나 다르겠어”라는 생각은 시동을 거는 순간 바뀐다. 매서운 하이톤의 배기음은 흡사 레이스카를 연상시킨다. 일반 S60 T6가 아무리 고성능이라도 얌전한 소리를 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일반적인 저속 구간에서의 거동은 통상의 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묵직한 듯 하면서도 지그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경쾌하게 움직이다. 아무래도 단단한 서스펜션과 편평비가 낮은 타이어 탓에 요철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올린즈 서스펜션은 감쇠력을 30단계로 조절할 수 있어 일상 주행의 편안함과 본격적인 스포츠 세팅을 오갈 수 있다.
아무래도 2리터의 배기량에서 높은 출력을 끌어내려다 보니, 극초반에는 약간의 터보래그가 발생한다. 하지만 비슷한 레이아웃의 메르세데스-AMG 엔진과 비교하자면 슈퍼차저와의 조합 덕분에 초반에도 묵직한 토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터보차저가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 로켓같은 가속이 시작된다.
최대토크는 본격적인 가속이 시작되는 3,100rpm부터 터져 나온다. 볼보가 기본적으로 잘 달리고 잘 도는 차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가속력에 고개가 젖혀진다. 일부러 앞서가던 S60 T5와 거리를 벌리고 직선주로에 들어섰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변속 때마다 후적음이 터져 나오는 머플러도 볼보의 순정 파츠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인제 스피디움의 1번 코너는 내리막과 코너가 복합돼 제동성능과 조향성능이 동시에 시험에 드는 구간이다. 하지만 6-피스톤 브레이크는 노면에 가라앉듯 차를 멈춰 세우고, 가벼운 4기통 엔진이 얹힌 노즈는 가볍게 방향을 돌린다.
4륜구동 시스템은 매 순간 앞뒤로 구동력을 배분하는데, 다른 회사들에 비하자면 구동력 배분은 다소 보수적이다. 코너에서 언더스티어를 피할 정도로 후륜에 구동력을 전달하지만 결코 오버스티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차를 날려 오버스티어를 연출하려 해도 앞바퀴가 이내 방향을 다잡는다.
S60과 V60 폴스타의 출고 타이어는 최적의 스포츠 타이어로 꼽히는 미쉐린 파일럿 슈퍼스포츠. 뛰어난 그립력의 타이어와 매끄러운 4륜구동 시스템이 크지 않은 S60의 차체를 힘껏 밀어낸다. 엔진 속 부품 하나, 서스펜션 링크 하나까지도 새롭게 설계된 덕에 평범한 S60과는 전혀 다른 꽉 조여진 느낌이 일품이다.
BMW의 스포츠 모델이 극한의 코너링에서 위험과 카타르시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릴을 제공한다면, 볼보의 재미는 좀 더 정제되고 침착하다. 자세제어장치는 마치 운전자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듯 하다가 조금만 슬립이 발생하면 소리소문없이 작동해 위험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매끄러운 코너링과 어떤 굴곡에서도 지치지 않는 가속력은 폴스타의 저력을 잘 보여준다. 운전 중 둔하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않고 노면과 하나가 된 듯 달리는 실력이, 과연 볼보가 기본기 역시 뛰어난 브랜드임을 증명한다. 아마도 정식으로 서킷에서 기록을 계측하면 웬만한 경쟁 브랜드들 못지 않은 기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S60, V60 폴스타의 국내 판매 가격은 각각 7,660만 원, 7,880만 원이다. 국내에서 경쟁자를 꼽자면 메르세데스-AMG C43(C450 AMG), 재규어 XE S, 인피니티 Q50S 하이브리드 등이 있겠다. 300마력대 중반의 성능으로 데일리 드라이브와 퍼포먼스를 동시에 충족하는 고성능 모델에 해당한다.
각각의 경쟁 모델들이 모두 다른 색을 지녔지만, 폴스타는 묵직한 4륜구동과 다운사이징 엔진의 조합으로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러운 고성능을 선보인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은연중 개성을 드러내는 디자인이며 퍼포먼스가 그렇다. 또 고성능 왜건으로선 유일한 선택지라는 점도 솔깃하다.
그렇다면 폴스타는 지금이 완생(完生)일까? 시승하면서 느꼈던 좋은 부분들과 별개로, 이에 대한 답은 ‘No’다. 유감스럽게도 현행 S60이 제법 구형인 까닭이다. S60과 V60은 이미 훌륭한 가치를 지닌 모델이지만, 폴스타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하기에는 보다 새로운 차체가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미 볼보가 차세대 XC90과 S90, V90 등을 출시하며 다음 세대 볼보는 지금보다 훨씬 ‘기대할 만 하다’는 것을 보여준 만큼, 신형 S60은 디자인과 퍼포먼스 등 여러 부분에서 더 나아질 것이 자명하다. 여기에 지금과 같은, 혹은 더 강력한 폴스타의 터치가 더해진다면 경쟁사들도 결코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볼보 코리아가 이러한 볼보의 아이덴티티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차에 대한 컴플렉스에 젖어 끊임없이 숫자와 기록만을 비교하는 여타 브랜드와는 달리, 볼보는 ‘다름’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이미 XC90, S90에서 그래왔고 폴스타에서도 그렇다. 길 위에 넘쳐나는 독일차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분명 설득력 있는 대안이다.
폴스타의 어원인 북극성은 ‘여행자의 별’이라고도 불린다. 대단히 밝지는 않지만 항상 같은 장소에 있기 때문에 길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돼 준다. 지금의 폴스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직까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폴스타는 남다른 가치로 승부수를 내미는 볼보의 새로운 이정표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