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이야!”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 준다는 TV 광고를 기억하는가? 사골 육수는 여러 음식에 두루 사용되지만 아주 오랜 시간동안 쉬지 않고 뼈를 우려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식재료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상당히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사골이 좋은 의미는 아니다. 오랫동안 끓여내는 특징에서 착안해 ‘장기간 이렇다 할 변화나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제품’을 사골로 통칭하기도 한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풀체인지가 장기간 이뤄지지 않은 모델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현재 상품성이 뛰어나거나 풀체인지를 할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은 모델이라면 사업적으로 봤을 때는 오랫동안 단일 모델을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지만, 소비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국산차 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진한 사골 자동차를 모아봤다.
쌍용 렉스턴W: 2001년 출시
국산 사골의 대부(?)는 단연 쌍용 렉스턴W다. 2001년 처음 출시되고 올해로 15년차를 맞이했다. 현재 시판 중인 몇 안되는 국산 프레임바디 SUV이기도 하다. 지금은 위상이 많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쌍용차의 SUV 기함이다.
‘대한민국 1%’라는 강렬한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등장했던 렉스턴은 4년 6개월 동안 22만 대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도 수출되며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디자인하고 메르세데스-벤츠의 엔진을 얹었다. 첨단 옵션과 북미 충돌테스트에서 별 5개를 받을 만큼의 안전성도 갖췄다.
당시 쌍용차의 기함이던 1세대 체어맨과 맞먹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고급형 SUV 수요를 빨아들여 국산 SUV의 고급화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러나 이후 많은 굴곡을 겪으며 모델체인지 타이밍을 놓쳤다. 대신 꾸준히 상품성 개선을 진행해 생명을 연장했다. 세 차례의 부분변경이 이뤄졌고, 엔진은 더 많이 바뀌었다. 현재는 2.2L 디젤 엔진과 아이신 자동변속기가 조합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렉스턴도 은퇴를 앞두고 있다. 내년 후속 모델인 Y400이 출시를 앞두고 있기 때문. 몸집을 대폭 키우고 편의사양과 주행성능도 강화했다. 업계에 따르면 렉스턴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지는 않을 것 같지만 과거 렉스턴이 추구했던 프리미엄 대형 SUV 컨셉은 계승한다. Y400 출시는 내년 3월 경으로 전망된다.
쉐보레 캡티바: 2006년 출시
쉐보레 캡티바는 도중에 브랜드와 차명까지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유구한 역사를 숨길 수는 없었다. 2006년, GM의 쎄타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국GM 주도 하에 개발된 SUV가 캡티바다. 당시 국내에서는 GM대우 윈스톰으로 출시됐다. 이 때를 첫 출시로 보면 올해로 10년차를 맞이하는 셈이다.
윈스톰은 롱바디와 숏바디 등 2가지 버전이 개발됐는데, 롱바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윈스톰-캡티바고 숏바디의 경우 유럽에서는 오펠 안타라로 판매되고 국내에서는 윈스톰 맥스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국내에서는 이렇다 할 인기를 끌지 못해 2년여 간 짧게 생산된 후 단종됐다.
2018년 상품성 개선 모델이 출시되고 2011년에는 GM대우가 쉐보레로 브랜드명을 바꾸면서 윈스톰도 캡티바로 모델명이 변경됐다. 전면부와 실내 디자인이 변경되고 2.2L 디젤 엔진이 투입됐다. 이후 2015년 유로5 모델 재고 소진으로 일시적으로 단종됐으나, 올해 3월 유로6 엔진과 신규 디자인을 두른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됐다.
초기와는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구형 모델의 흔적이 남아있다. 윈스톰 첫 출시 당시 1세대였던 기아 쏘렌토는 이미 3세대가 출시된 지 2년이 지났으니 경쟁모델과의 격차가 더욱 심해졌다. 내년 또는 후년에 북미에서 중형 SUV인 쉐보레 에퀴녹스를 수입해 캡티바를 대체한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캡티바 후속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기아 모하비: 2008년 출시
언제나 사골이 경쟁력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아 모하비의 경우 오히려 초기에는 빛을 보지 못했으나 뒷심있는 판매 성장으로 모델의 수명이 연장된 경우에 해당한다.
2008년 1월 출시된 모하비는 기아차의 첫 대형 SUV다. 출시 당시부터 북미 대형 SUV 시장 공략을 염두에 두고 개발됐다. 정의선 부회장이 당시 개발을 진두지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출시와 함께 터진 2008년 경제위기로 고급 SUV였던 모하비는 기대 이하의 실적을 거두게 된다.
3.0L 디젤과 3.8L 가솔린, 4.6L 가솔린 등 대배기량 엔진은 경제위기 속에서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했고, 조기단종 설까지 나왔다. 그러나 2011년 상품성 개선과 더불어 레저 열풍이 본격화되면서 화려한 부활을 시작했다. 출시 첫 해 8,900대 선이던 판매는 2010년 5,651대까지 추락했다가 2011년부터 다시 회복세를 보여 2013년에는 9,012대나 판매됐다.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다가 2015년에는 유로6 도입으로 일시 단종됐다. 그리고 올해 2월 유로6에 대응하는 신규 엔진을 탑재하고 상품성을 개선한 더 뉴 모하비가 출시됐다. 출시 8년차인 올해 11월까지 모하비의 누적 판매량은 1만 3,256대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쯤 되면 ‘사골’보다는 ‘장수모델’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쌍용 체어맨W: 2008년 출시
2008년 3월 출시된 쌍용 체어맨W는 쌍용이 야심차게 선보인 플래그십 럭셔리 세단이다. 전륜구동 위주의 국산 럭셔리 세단 시장에서 처음으로 후륜구동 V8 구동계를 탑재한 모델이었다. 리무진 버전의 경우 국산차 최초로 1억 원을 넘어선 모델이기도 하다.
1세대 체어맨이 메르세데스-벤츠의 W124 E-클래스 플랫폼을 활용해 개발된 것과 달리 체어맨W는 완전한 독자 플랫폼을 사용한 점부터 차별화를 꾀했다. 여기에 메르세데스-벤츠의 5.0L V8 엔진을 탑재해 국산차 중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306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했고, 국산차 최초의 하만카돈 오디오 시스템과 보그워너 사의 전자식 4륜구동 시스템까지 탑재하는 등 당대 최고의 플래그십 세단이라 할 만했다.
출시 첫 달에는 에쿠스를 앞질러 월 1,000대 이상이 판매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앞뒤 디자인이 바뀐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됐고, 이후에도 몇 차례의 상품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현대가 제네시스 브랜드를 독립시키고 지난 해 EQ900를 출시하면서 현재는 월 수십 대 수준의 판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SUV 전문 브랜드가 출시한 플래그십 세단이라는, 체어맨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쌍용차는 당장 체어맨W의 풀체인지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지만 체어맨 브랜드는 이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담으로 지난 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업무용 차량으로 체어맨W를 선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쉐보레 크루즈: 2008년 출시
자동차마다, 브랜드마다 모델체인지 주기는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부분변경은 출시 후 2~3년 뒤 이뤄지고 풀체인지는 4~5년 주기로 이뤄지는 것이 작금의 업계 현황이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소형 모델일 수록 모델체인지가 빠르게 이뤄지고, 고급 브랜드의 럭셔리 모델일 수록 모델체인지가 늦다.
그러나 항상 그런 공식이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쉐보레 크루즈는 올해로 국내 출시 8년 차를 맞은 모델이다. 2008년 11월에 출시됐으니 만으로는 8년을 꽉 채우고 9년 차에 들어섰다. 크고 작은 변화가 여럿 이뤄졌지만 유행에 처진 감은 있다.
2008년 당시 GM대우에서 라세티 프리미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크루즈는 세련된 디자인과 탄탄한 차체로 출시 초기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이듬해인 2009년에는 2.0 디젤 모델을 추가하면서 주행성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쉐보레 출범과 함께 이름을 크루즈로 바꾸고 1.4 터보를 추가하는 등 여러 차례 상품성 개선이 이뤄졌다.
2015년에는 뒷모습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어메이징 크루즈를 선보였고 얼마 후 LED 주간주행등과 프로젝션 헤드라이트가 추가된 2016년형을 출시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디젤 엔진은 유로6 대응에 따라 1.6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차체는 그대로다. 다행히도 크루즈는 2017년 초 풀체인지를 앞두고 있다. 특히 모델 노후화로 아반떼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판매를 기록 중인 상황에서, 내년 반등에 성공할 것인 지 귀추가 주목된다.
르노삼성 SM3: 2009년 출시
르노삼성은 올해 대표 장수 모델이었던 QM5를 단종시키고 QM6를 출시했다. 하지만 QM3와 올해 출시된 SM6, QM6 외의 기존 세단 라인업은 대체로 연식변경 주기를 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SM3의 경우 사골 라이벌(?)인 크루즈보다는 새 차지만 내년에도 모델체인지 계획이 없다.
1세대 SM3가 닛산 블루버드 실피에 기반했던 것과 달리 2세대 SM3는 르노 메간 플랫폼을 활용해 유러피언 감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2009년 처음 출시돼 세련된 스타일로 호평받았다. 2세대 출시 후에도 1세대 모델을 2년 간 병행판매한 점도 특징. 국산 준중형 중 유일하게 자트코제 CVT 자동변속기를 탑재했다.
2012년에는 연비를 대폭 개선한 부분변경 모델을 선보였고, 2014년4월에 두 번째 부분변경 모델인 SM3 네오가 출시됐다. 부분변경 시 지속적으로 상품성이 개선됐으며 2016년에는 1.5 dCi 모델도 추가돼 디젤 수요에 대응했다. 국산 전기차 중 유일한 세단형 모델인 SM3 Z.E.도 시판 중이다.
그러나 영원히 좋은 차는 없다. 유럽에서 신형 메간이 출시되면서 내년 후속 모델 출시도 점쳐졌으나 르노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내년에는 클리오 외에 신차 출시 계획이 없다. 현행 SM3가 여전히 충분한 상품성을 갖췄다는 이유다. 소비자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지만, 1세대 SM3 또한 9년이나 판매가 이어졌던 만큼 2세대 역시 내후년에나 풀체인지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카운티: 1998년 출시
마지막 사골 모델은 상용차다. 현대차의 경우 승용 모델의 풀체인지 주기가 매우 빠른 편이라 승용차 중에는 ‘사골’을 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용차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상용차의 모델체인지 주기가 긴 편이지만, 이 차는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25인승 버스 카운티다.
현대 카운티의 출시는 무려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미니버스 ‘코러스’의 후속으로 출시됐다. 중형 트럭인 마이티의 프레임 바디를 활용했으며, 때문에 운전석 뒤 실내에 있는 엔진이 특징적이다.
대부분의 버스가 주문생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운티도 주문에 따라 다양한 사양이 존재한다. 고급스러운 시트나 스윙도어를 장착하기도 하고, 관광용 뿐 아니라 마을버스, 소방지휘차 등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2년 기아 콤비가 단종된 뒤로는 미니버스 시장을 10년 넘게 독점해 왔다. 카운티가 오랫동안 좀처럼 상품성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이처럼 공고한 독점체제 때문이다.
2012년 대우버스 레스타가 출시되면서 독점체제에도 금이 갔고, 이후로 자동변속기가 탑재되는 등 상품성 개선이 이뤄졌다. 특히 수요가 많은 중국시장에서는 2015년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되기도 했다. 한때 쏠라티가 카운티의 후속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현재까지도 병행 생산되고 있다. 학원버스 등으로 꾸준히 수요가 많은 모델인 만큼 소비자들은 후속모델 개발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