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재규어의 디자인 총괄 디렉터인 이안 칼럼(Ian Callum)이 한국을 찾았다. 올해 초 방한에 이어 두 번째다. 재규어 코리아가 주최한 ‘재규어 카 디자인 어워드’의 최종 결선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1월, 재규어 디자인 마스터 클래스에 이어 이번에도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오롯한 디자인 철학을 전했다.
재규어 카 디자인 어워드는 차세대 자동차 디자이너 육성을 목표로 재규어 코리아가 기획한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해 최종적으로 13팀이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이번 공모전의 테마는 ‘재규어 디자인 헤리티지를 재해석하라’. 자연스럽게 이안 칼럼의 이야기도 전통과 헤리티지에 관한 쪽으로 기울었다. 재규어 디자인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으로 알려진 이안 칼럼에게 전통이란 어떻게 해석될까?
“내가 스스로 정한 미션(mission)은 재규어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이안 칼럼이 말한 첫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흔히 전통을 계승하는 것과 재창조는 완전히 상반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브랜드의 헤리티지가 단순히 형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는 특정한 형태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닌, 아름다운 라인과 표면 처리, 매력적인 비례와 같은 추상적인 요소들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3살 때부터 자동차 디자인을 꿈꿨고, 9살 때 직접 그린 그림을 재규어에 보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는 방법을 물은, 당돌한 꼬마였다. 그는 어린 시절 주변에 있는 기계라면 거실의 새 텔레비전부터 전화기까지 닥치는대로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자동차 디자인에 매료됐다고 회고했다.
특히 6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재규어였다. 이안 칼럼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재규어는 “쿨한” 브랜드였다. 매혹적인 보디라인과 이상적인 비례감, 우아한 면처리로 지금도 자동차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차 리스트에는 항상 재규어가 들어간다.
특히 독특한 테일핀을 갖춘 레이스카 D-타입, 완벽한 비례감을 선보이는 E-타입같은 고성능차들은 물론 권위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XJ6 설룬같은 모델들은 재규어만의 독특한 헤리티지를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포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뒤 1999년, 이안 칼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재규어의 디자인 총괄 디렉터가 됐지만 재규어는 더 이상 과거같지 않았다.
“18년 전 내가 재규어에 들어왔을 때, 재규어는 아직도 옛날 그 디자인의 차를 그대로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헤리티지 브랜드’라고 불렸지만, 동시에 젊은이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할아버지 차라는 오명도 얻어야 했다.”
그는 당장 칼을 빼들었다. 동그란 두 개의 헤드램프와 납작한 리어 스타일로 대변되던 재규어는 XK를 시작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XF에 이르러서는 재규어만의 패밀리 룩을 재정립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반발도 심했다. 이전 재규어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규어의 헤리티지는 옛날의 그 외관이 아니다. 비례와 시대를 앞서가는 모던함, 심플한 디테일과 날렵한 프로파일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그는 재규어가 시판 중인 모델을 하나씩 읊으며, 디자인의 비화를 언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가령 컴팩트 세단인 XE는 BMW 3시리즈와 너무 비슷한 비례를 갖게 돼 1mm씩 디자인을 조정하며 마침내 재규어만의 비례를 완성했다고 이야기했다. 또 최근 2세대로 탈바꿈한 XF에 대해서는 “재규어는 실용성과 어울리는 브랜드가 아니지만, 다양한 소비자들의 요구에 따라 타협함으로써 뒷좌석 공간을 크게 넓혔다”고 덧붙였다.
브랜드 최초의 SUV인 F-페이스에 대해서는 자신이 두 번이나 개발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그는 10년 전 재규어 브랜드의 SUV를 처음 제안받았지만 거부했고, 또 5년 전 두 번째 제안도 거부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세 번째 제안을 받았을 때는 세상이 재규어의 스포티한 아이덴티티가 담긴 SUV를 원한다고 느꼈고, 또 그것을 기술적으로 달성할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해 F-페이스를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재규어 디자인의 미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안 칼럼은 얼마 전 LA 오토쇼에서 공개된 I-페이스가 재규어의 미래를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밝혔다. “I-페이스는 전기차의 디자인적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모델이다. SUV에 스포츠카의 라인을 담았고, 또 엔진의 배치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극단적인 공기역학 설계와 슈퍼카같은 미드십 비례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는 엔진이 없고 배터리와 모터를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전기차의 기술적 이점 덕에 자동차 디자인도 크게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규어의 히스토릭 모델에 담긴 과장들, 가령 긴 보닛이나 휠보다도 낮은 시트 배치 등 극단적인 디자인을 다시금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I-페이스는 컨셉트카 개발 과정부터 양산계획이 함께 추진돼 불과 18개월여 뒤면 양산모델을 만날 수 있다.
이안 칼럼의 디자인 철학에 관한 질문들도 이어졌다. 자동차 이외에 디자인적 영감을 주는 소스(source)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건축, 패션, 자연경관 등 많은 곳에서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디테일한 표현이 아니라 그러한 형태나 물건이 주는 분위기, 공기다”라고 답했다. 미시적인 디자인 요소가 아닌 분위기 그 자체를 디자인으로 담는다는 것.
자신과 같은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수직적 사고보다 수평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상황에 대해 뻔한 답을 내기 보다는 또 다른 방법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수평적 사고가 어디에서나 혁신을 위해 필요하지만 특히 디자이너에게는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또 에드워드 드 보노의 “수평적 사고”라는 저서를 추천하기도 했다.
한편,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공학이나 다른 현실적 요소를 얼마나 고려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는 “완전히 고려해야 한다”고 답했다.
“디자이너는 어느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최종 결과물을 고려해야 하는 것에는 틀림없다. 가령 아름다운 차를 디자인하고 싶더라도 밴을 디자인해야 한다면 사각형 상자 형태를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다. 디자인하면서 무엇을 고려해야 할 지 우선순위를 세우고, 그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는 보다 구체적인 사례도 덧붙였다. “가령 내가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는 공기역학이나 운동성능, 충돌안전법규, 심지어 비용이나 기술적인 구현가능여부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부분들은 브랜드의 성공을 위해 세부적 요소를 인지하고 맞춰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양보하지 않을 때도 있다. F-페이스를 디자인할 때 엔지니어들은 더 작은 휠을 끼우기 원했지만, 나는 왜 더 크고 멋진 휠을 장착해야 하는 지 설득해야 했다. 싸우기도 해야 하고, 협상도 해야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아름다운 것을 그려놓고 만들어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직업이다.”
그 밖에도 그는 학생들과 디자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강조한 것은 디자인의 원초적인 역할이었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지 혼란을 줘서는 안됩니다. 형태는 기능에 충실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의 말에는 재규어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차로 꼽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