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니스에서의 메르세데스-벤츠 글로벌 시승회 첫날에는 27년 만에 부활한 S클래스 카브리올레를 시승했고, 둘째 날에는 SLC를 시승했다. SLC는 그 동안 SLK라고 불렀던 모델이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쿠페, 로드스터, 그리고 SUV등 모든 모델 라인업을 C, E, S를 기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C클래스 급의 로드스터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SLC가 됐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SL이 SLS나 SLE가 된 것은 아니고, GLK가 GLC가 된 것처럼 SLK도 SLC가 된 것이다.
이번 SLC는 1996년 등장과 함께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던 2인승 로드스터 SLK의 3세대 모델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당시는 마쓰다 미아타에서부터 촉발된 2인승 소형 로드스터의 인기가 포르쉐 박스터, 메르세데스-벤츠 SLK, BMW Z3의 가세로 폭발적으로 커지는 계기가 마련되던 시기다.
SLK는 철판으로 된 지붕이 열리는 하드탑 컨버터블을 선보이면서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기술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쿠페 컨버터블 모델들의 선구자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SLK의 등장으로 쿠페와 로드스터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SLK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BMW는 하드탑 컨버터블은 운동 성능에 불리하며, 역동적인 BMW는 소프트탑을 고집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Z4에 하드탑 컨버터블을 적용한 데 이어, 지금은 고성능 모델의 대명사인 M4 컨버터블에까지 하드탑 컨버터블을 적용하고 있다. 그만큼 하드탑 컨버터블의 매력이 크다는 말이다.
전날 S클래스 카브리올레를 시승하고서 충격적으로 뛰어난 강성과 탁월한 운동성능, 매력적인 디자인과 최고의 고급스러움을 두루 갖추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터라, 더 작고 상대적으로 값도 싼 SLC가 과연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시승에 임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벤츠 담당자는 SLC는 훨씬 더 다이나믹한 주행이 가능한 모델인 만큼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S클래스 카브리올레 시승을 마쳤던 프랑스 남부 니스의 호텔 앞에는 이제 20여 대의 SLC가 도열해 있었다. 준비된 모델들은 메르세데스-AMG SLC 43과 메르세데스-벤츠 SLC 300, SLC 250d다. 어제처럼 SLC도 AMG 모델을 먼저 찜했다. 성능이 낮은 모델을 먼저 타고 후에 고성능 모델을 타는 게 더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먼저 가는 모델로 발걸음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SLC는 이전 3세대 SLK에 비해 디자인이 약간 변했다. 앞모습의 터치가 살짝 변한 수준인데도, 이름이 바뀐 탓인지 첫눈에 전혀 다른 모델처럼 다가온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테두리가 예리해지고, 헤드램프가 현행 E클래스를 살짝 닮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릴 안쪽에는 다이아몬드 패턴이 빼곡히 자리를 잡았다. AMG 모델은 그릴 안쪽에 AMG 배지도 달았다.
범퍼 아래 공기 흡입구도 더 크고 근육질 라인으로 바뀌었다. AMG 모델은 전통적인 A-윙 디자인이 적용됐다. 이런 터치들로 인해 2세대 SLK에 비해서 다소 밋밋했던 3세대 SLK의 앞모습에서 훨씬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신했다.
옆모습에서는 큰 변화가 없고 뒷모습에서는 리어컴비네이션 램프 안쪽 그래픽이 더 화려해지고, 범퍼 하단 디자인도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실내도 큰 변화는 없고, 기어레버와 스티어링 휠, 계기판 정도가 바뀌었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제와 너무 비교가 많이 됐다. 하지만 오늘은 SLC에 집중해야 한다. S클래스 카브리올레와 달리 SLC는 센터 터널에 기어레버가 위치해 있다. 예전과 달라진 귀엽고 조금은 화려한 기어레버를 조작하고 출발했다. SLC 43은 AMG 모델 답게 곳곳에 카본 장식이 더해지고, 데시보드 상단의 아날로그 시계도 명품 IWC 제품이 장착돼 있다.
출발하면서 막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벌써부터 사운드가 심상치 않다. 엑셀을 조금 깊이 밟자 지금까지의 AMG 사운드와는 사뭇 다른 날카롭게 치솟는 소프라노 사운드가 터져 나온다. 메르세데스-AMG SLC 43에는 V6 3.0 트윈터보 엔진이 얹혔다. 이 엔진은 메르세데스-벤츠 C450 AMG를 통해서 먼저 경험했던 엔진인데 그 때의 감동이 SLC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V6 3.0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367마력, 최대토크 53.1kg.m를 발휘하고, 9단 자동 변속기 9G-트로닉과 어울려 0~100km/h 가속 4.7초, 최고속도 250km/h를 자랑한다.
과거에도 C32 AMG 같은 모델에 V6 엔진이 얹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오랜만에 AMG 엔진 패밀리에 V6 엔진이 추가됐다. 하긴 이미 4기통 AMG 모델들이 있는 만큼 V6가 크게 낯설지는 않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난번 C450 AMG는 정식 ‘AMG’ 가족이 아닌 ‘AMG 스포트’ 라인이다 보니 이름이 ‘메르세데스-벤츠 C450 AMG’였었다. ‘메르세데스-AMG’ 브랜드의 모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같은 엔진을 얹은 SLC는 메르세데스-AMG SLC 43이다. 이건 무슨 일이지? 같은 엔진을 얹는데도 하나는 정식 AMG이고, 다른 하나는 정식 AMG가 아니고.
그렇다면 이 엔진은 AMG의 전통인 ‘원맨 원엔진’ 방식으로 만든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SLC 43에 얹힌 엔진도 지난번 C450 AMG에 얹힌 엔진처럼 AMG로고도 제작자의 싸인도 붙어 있지 않은 메르세데스-벤츠 엔진이다.
궁금한 부분을 시승 후에 AMG 담당자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제부터는 ‘원맨 원엔진’으로 만든 엔진이 아니어도 AMG 모델에 장착 될 수 있으며, SLC 43은 정식 메르세데스-AMG 모델이 맞다고 한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선보이면서 메르세데스-벤츠 C450 AMG로 출시된 세단과 에스테이트도 지금 기준으로는 정식 AMG 모델이 맞으며, 향후 페이스리프트 시점에서 이름을 메르세데스-AMG C 43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C클래스 쿠페와 카브리올레의 AMG 모델은 이미 메르세데스-AMG C 43 쿠페와 카브리올레로 출시가 됐다.
AMG 모델인데도 ‘원맨 원엔진’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엔진을 얹었다는 점이 어딘가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것은 머리 속에서만 울리는 메아리일 뿐 몸과 가슴은 벌써부터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어제의 감동 때문에 오늘은 숨어 버렸던 호감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SLC 43은 지금까지 그 어떤 SLK들보다 더 짜릿하고 강력하게 가속한다. 특히 고회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운드는 8기통 AMG와 달리 가늘고 화려하면서도 강렬하다. 사운드와 더해져 가속에서 느끼는 쾌감은 배가된다.
코너에서도 SLC 43은 더 안정적이고 강력해졌다. 과거 너무도 쉽게 오버스티어가 발생하던 그 SLK가 아니다. 물론 휠베이스가 더 길고 안정적인 모델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강력한 코너링 실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과거의 SLK 55 AMG와 비교한다면 6기통의 컴팩트하고 가벼워진 엔진 덕분에 거동이 확실히 경쾌해졌다.
시승 도중 비가 내리기 시작한 상태에서 프랑스 남부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가자 코너마다 뒤가 픽픽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고속 코너는 아닌데다 ESP가 적절히 자세를 잡아 주니까 신나게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비가 살짝 내리긴 했지만 SLC를 타고 지붕을 열지 않을 수 있나? 이번 SLC에 적용된 변화 중의 하나가 탑을 열면서도 주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단 주행 중에 바로 열거나 닫을 수는 없고, 일단 멈춘 상태에서 열거나 닫기를 시작한 후 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차가 40km/h까지는 속도를 높여도 된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신호대기 등에서 탑을 열거나 닫을 때 전혀 부담이 없겠다.
빗줄기를 무릅쓰고 탑을 열고 한참을 달렸다. 다행히 빗줄기가 강하지 않은 데다 달리기 시작하자 실내로 빗물이 많이 들이치지는 않았다. 그래 이 정도 빗줄기는 즐기는 거야. 4월의 프랑스 남부는 무척이나 온화할 테지만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 때문에 기온도 상당히 낮아졌다. 결국 에어스카프를 켜고 목 뒤로 훈훈한 바람을 맞으며 운치 있는 오픈 에어링을 한껏 즐겼다. 어느새 다소 투박하고 싸게 느껴졌던 실내가 달라 보이고 있었다. 몸에 잘 맞는 캐주얼 차림이면서 한껏 멋스러운 그런 인상이다.
신형 SLC는 작은 디자인 변화지만 만족도가 무척 높고, SLC 43에 적용된 6기통 엔진은 놀라운 성능과 사운드를 제공한다. 달리기 실력이 그야말로 출중해 지면서 SLC와 AMG의 멋진 콜라보 무대가 완성됐다. 산길을 달리는 동안 서킷 생각이 났다. 과거 SLK로 서킷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SLC 43이라면 서킷으로 달려가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동성이 크게 향상됐다. 거기다 과거처럼 무거운 8기통 엔진이 아닌 것까지 감안하면 SLC 43의 인기가 무척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SLC 43 시승 후 커피 브레이크 뒤에 메르세데스-벤츠 SLC 250d로 옮겨 탔다. 사실 SLC 디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동안 국내에 SLK 디젤은 들어온 적이 없는 만큼 이번에도 국내에 들어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SLC 250d의 첫 느낌은 ‘의외로 잘 나가네!’ 였다. 당연히 SLC 43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염려했던 것보다는 무척 경쾌했다. 엔진 소음도 잘 억제됐다.
SLC 250d에는 4기통 2.2리터 디젤 엔진이 얹혀 최고출력 204마력, 최대토크 51kg.m를 발휘하고, 0~100km/h 가속에는 6.6초, 최고속도 245km/h에 이른다. 그렇다. 디젤엔진을 얹었지만 강력한 토크와 출력 덕분에 결코 만만치 않은 달리기 실력을 갖춘 것이다. 거기다 디젤이니 연비까지 좋을 터. SLC의 멋진 오픈 에어링을 좀 더 경제적으로, 실생활에서 좀 더 자주 즐기기에는 250d가 제격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낭패다. 이미 SLC 43을 경험해 버렸기 때문이다. 잘 달리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V6 터보 AMG 엔진의 짜릿한 사운드가 귓전을 맴돈다.
그래서 원래 계획에 없던 모델을 하나 더 시승했다. 원래는 2가지 엔진 버전만 시승할 계획이었다가 함께 준비돼 있던 SLC 300도 잠깐 타 보기로 한 거다. SLC 300이라면 기존의 SLK 350을 대체할 모델이 되겠지만 엔진은 강력한 다운사이징을 거쳤다. 4기통 2리터 터보 엔진으로 최고출력 245마력, 최대토크 37.7kg.m의 힘을 뿜어내고, 0~100km/h 가속은 5.8초에 끝내고, 최고속도는 역시 250km/h에 이른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간단하게 니스 시내를 달려보려고 나섰는데, 역시나 얕잡아 볼 수 없다. 우선 조용한 엔진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는 데서 ‘역시 가솔린 터보 엔진!’ 이라는 감탄이 터져 나온다. (역시 인간은 간사하다. 하루 동안 마음이 몇 번을 바뀌는지 원…)
SLC 300은 아무래도 가장 많이 선택을 받는 모델이 될 것 같다. 지난 SLK 350에 비해 엔진이 가벼워진 만큼 무게 배분에서도 더 유리하고 몸놀림도 훨씬 더 경쾌하다. 그러고 보니 AMG GT를 시작으로 최근 여러 AMG 모델들을 비롯해서 다운사이징 메르세데스-벤츠의 모델들의 공통점은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아주 짧았던 SLC 300 시승을 끝으로 SLC 시승도, 니스의 여정도 끝이 났다.
3세대 SLK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SLC로 이름을 바꾸면서 약간의 디자인 변화와 함께 혁신적인 신형 엔진들이 적용되면서 매우 높은 상품성 향상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달리기 실력이 어제의 그 호화로웠던 S클래스 카브리올레를 잊어 버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짜릿했다.
그 중에서 역시 가장 압권은 메르세데스-AMG SLC 43이다. 단순히 힘이 더 좋고 빠른 모델이라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SLK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날카롭고 강렬한 사운드와 정교한 주행 감각이 SLC의 격을 한 차원 높였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국내에서도 꼭 만나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