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요 근래 고성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해 말부터 EQ900 출시 이후까지 한참 프리미엄 홍보에 열을 올리더니, 최근에는 브랜드 홈페이지에 “Before N”이라는 연속 기획까지 연재했다. 작년에는 WRC에서의 포디움 입성도 뒤늦게야 보도자료를 돌리곤 했지만 지난 주 아르헨티나 랠리의 승전보는 발빠르게 전해왔다.
“왜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현대차의 올해 첫 컨셉트카인 뉴욕 컨셉트도 스포츠 세단이었다. 올해는 고성능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작년 알버트 비어만 부사장이 취임한 이래로 준비해 온 결과물이 이제 드러날 때가 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와중에 아반떼 스포츠가 출시됐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반떼 스포츠의 소식을 예전부터 들어 왔다. 작년부터 KSF(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신형 아반떼의 1.6 터보 버전이 출시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에는 엔진만 바꿨으리라 생각했지만 제법 본격적인 세팅이 이뤄진다는 소식에 기대가 더해졌다.
앞서 현대에서 여러 스포츠 모델을 선보여 왔지만, 제네시스 쿠페같은 스포츠 전용 모델을 제외하고 양산모델의 스포츠 버전에서 이번만큼 공들여 차별화한 모델은 처음이다. 앞뒤의 디자인을 완전히 다르게 고치고 후륜에는 멀티링크 서스펜션까지 이식했다. 그만큼 다르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부푼 기대를 안고 아반떼 스포츠를 시승해 봤다.
아반떼 스포츠는 여러 의미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사실 상의 선대 모델인 아반떼 쿠페가 절망적인 판매고를 기록한 뒤 단종된 지 꼭 1년 만에 나온 고성능 아반떼며, 아반떼 사상 최초의 터보 모델이기도 하다. 또 현대기아차 원메이크 레이스인 KSF의 아반떼 챌린지 클래스의 경주차로써 대회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생애 첫 차” 세그먼트인 준중형 국산차 중 몇 안되는 스포츠 모델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쉐보레, 르노삼성에서는 아예 동급에 고성능 모델이 없고, 같은 파워트레인을 공유하는 기아 K3 쿱과 현대 벨로스터 정도가 경쟁상대다. 하지만 이들이 쿠페형 바디로 인해 실용성이 떨어지고, 스포츠카를 탄다는 것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반면 아반떼 스포츠는 세단 바디를 그대로 사용해 실용성도 잡고 부담도 줄였다. 이런 컨셉만 두고 보자면 폭스바겐 골프 GTI같은 스포츠 데일리 카에 근접하다 할 수 있겠다.
전장, 전폭은 각 4,570mm, 1,800mm로 일반 아반떼와 동일하지만 전고는 5mm 낮은 1,435mm다. 마이너스 옵셋이 더 강한 전용 18인치 휠이 적용되면서 앞뒤 윤거가 18mm, 13mm 줄어든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완전한 전용 세팅의 하체를 지녔다는 뜻이다.
아반떼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이래로 이렇게 섹시한 아반떼가 탄생하는 데에 자그마치 20년이 넘게 걸렸다! 신규 디자인의 HID 헤드라이트와 LED 테일램프가 전 트림에 기본으로 적용되고, 앞뒤 범퍼의 디자인도 완전히 다르다.
LED 주간주행등과 크롬 장식이 안개등이 있던 부위를 감싸고 그 안쪽으로 거대한 에어 덕트 형태가 갖춰졌지만, 덕트는 장식일 뿐 실제로는 막혀있다. 라디에이터 그릴 역시 신규 디자인이 적용됐고, 소심하게나마 헤드라이트 주변에 앞트임을 적용했다.
뒷 범퍼 역시 모서리에 각을 세웠고 리플렉터와 에어 덕트가 연결된 형태의 범퍼 장식도 더해졌다-이 덕트도 가짜다. 범퍼 하단에는 과격한 디퓨저가 부착됐고, 두툼한 트윈 머플러 팁으로 마무리된다. 사이드 스커트와 18인치 알로이 휠도 기본이다. 추가금 없이 2종의 전용 컬러도 선택 가능한데, 특히 블레이징 옐로우는 BMW M에서 애용하는 피닉스 옐로우/오스틴 옐로우를 연상시킨다.
풍부한 기본사양은 기본 트림의 가격 인상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간 기본 트림에서 고급화 사양 선택이 제한된다는 불만이 제기돼 온 것에 대한 대답과도 같다. 수동변속기 기본 트림에서조차 외관 상 부족함이 없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공들여 만든 스포츠 모델인 만큼 실내에서도 여러 차별화 요소가 드러난다. 먼저 홀력이 우수한 스포츠 버킷 타입 시트가 1열에 적용됐다. 심지어 전 트림에 천연 가죽 시트가 장착된다. 스티어링 휠은 아이오닉 것과 동일한 디자인의 D-컷 타입이 장착되고, 레드 스티치와 더불어 그립 부위에는 타공 가죽을 둘렀다. 계기판도 앞서 벨로스터 터보, 쏘나타 터보 등에 선보였던 것과 같이 “0″이 6시 방향에 위치한 스포츠 타입이다. 안전벨트도 붉은 색으로 포인트가 된다.
흠잡을 곳 없는 외관과 달리 인테리어는 100% 대만족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선 스포츠 모델 치고는 운전석 시트 포지션이 너무 높다. 키 180cm의 성인 남성 기준으로 운전석 시트를 최대한 낮춰도 머리카락이 천장에 살짝 닿았다. 기왕 예쁜 시트를 만들었으면 더 낮췄어도 좋았을텐데… 조악한 재질감의 카본 그레인 트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메탈 그레인이나 블랙 하이글로시가 나았겠다.
“슈퍼 노멀”을 지향하는, 그만큼 평범한 아반떼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외모부터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 탑재되는 엔진은 204마력을 내는 1.6L T-GDi 엔진. K3 쿱, 벨로스터 터보 등에 탑재됐던 것과 동일하다. 유럽에서 i30 터보에 186마력 사양 엔진이 탑재된 적 있어 실용영역 토크를 강조하고 출력을 낮춘 버전이 탑재되리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퍼포먼스에 더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변속기는 6속 수동이 기본이고 7속 DCT 트림이 제공된다. DCT의 효율이 많이 다듬어졌는 지 수동(11.6km/L)보다 DCT(12.0km/L)의 연비가 더 좋은 것이 눈에 띈다. 공차중량은 수동이 1,350kg, DCT가 1,380kg로 30kg 가량 차이난다.
파워트레인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하체. 이례적으로 후륜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적용, 전반적인 코너링 성능을 대폭 끌어올렸다는 것이 현대차의 설명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멀티링크 서스펜션은 같은 모듈을 공유하는 아이오닉과 많은 구조를 공유했다고 한다. 토션빔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계 주행에서는 결국 멀티링크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당연히 멀티링크 탑재는 환영할 일이다.
시승은 영종도와 송도 시가지 서킷을 오가는 비교적 짧은 구간에서 이뤄졌다. 코스 대부분이 고속도로로 이뤄져 있어 다양한 상황에서의 거동을 확인하는 것은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때문에 이번 시승에서는 가속력과 DCT의 반응성, 그리고 고속주행에서의 서스펜션 움직임을 체크하는 데에 집중했다.
예상대로 가속감은 매우 경쾌하다. DCT의 기어비는 비교적 촘촘하게 짜여졌지만, 극단적인 가속형 기어비는 아니다. 대신 터보래그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크지 않은 차체를 지치지 않고 밀어낸다. 가속할 때는 배기음도 제법 들려오는데, 순정 머플러를 레이싱·튜닝 배기 업체로 유명한 피코 사에서 제작, 납품해 스포티한 음색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제 현대차의 중형급 이하 대부분의 전 모델에 적용되고 있는 듀얼클러치 변속기는 완숙한 성능을 자랑한다. 변속은 빠르지만 부드럽고, 특히 업시프트든 다운시프트든 변속충격이 잘 억제된 점이 마음에 든다. 다운시프트 시에는 6,000rpm까지 회전수를 보정해 주지만, DSG나 여타 수입차 듀얼클러치처럼 적극적으로 엔진 회전수를 띄워주지는 않고 부드러움에 초점이 맞춰졌다.
스포츠 모델이라면 보다 공격적인 변속이 이뤄져도 좋지 않았을까? 이전에도 강조했듯 모델의 성향에 따라 변속기 세팅을 달리 하는 기획도 필요해 보인다.
가속 성능은 예상된 수준이었지만, 서스펜션의 세팅은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온다.저속으로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도 잔진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깔끔하게 바닥에 내려앉으며, 급격한 선회에서도 롤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를 높일 수록 노면에 달라붙는 느낌은 예술의 경지다. 현대가 이런 서스펜션을 만들어 냈다니! 오히려 상급 모델인 쏘나타 터보나 제네시스 등과 견줘도 고속 안정성은 더 뛰어나다.
제동력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다. 아반떼 스포츠는 일반 아반떼보다 강력한 빅 1-피스톤 브레이크 시스템을 탑재했다. 가혹 조건의 브레이크 열내구성은 추후 테스트가 이뤄져야겠지만 고속에서 제동 시에도 불안감 없이 속도를 줄인다. 또 브레이크 페달의 작동 역시 초반에 답력이 몰려있지 않고 선형적으로 고르게 답력이 분배된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시승 구간이 대부분 직선로 위주였기에 짧은 진출로 구간의 코너에서만 조금 속도를 내 봤다. 순정 타이어가 225/40 R18 규격의 S1 노블2로, 승차감 위주의 타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코너에서 짧게나마 세련된 인상이 전해진다. 일반 아반떼 대비 차중은 늘어났지만 언더스티어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코너링 도중에 요철을 밟더라도 뒷바퀴가 요동치는 느낌은 거의 없다. 멀티 링크 서스펜션 특성 상 불규칙한 노면에서도 그립력을 일관되게 유지해 주는 덕이다. 경주용 차에도 적용되는 튜익스 서스펜션 시스템은 순정보다 더 공들여 세팅됐다고 하는데, 튜익스 서스펜션이 새삼스레 더욱 기대된다.
아반떼 스포츠를 타면서 느낀 점은, 현대도 이제는 스포츠를 이야기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결국 자동차의 본질은 더 빠르게, 더 잘 달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가장 비싼 차들은 가장 럭셔리한 차가 아니라 가장 빠른 차들이다. 편안해지는 것은 더 많은 편의사양과 흡음재로 이뤄낼 수 있지만 빨라지는 데에는 숙련된 노하우와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고성능 차를 잘 만드는 브랜드들이 그 기술력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래저래 쓴 소리를 많이 듣는 현대지만 그간 국산차 중 유일하게 스포츠 전용 모델을 개발하고 시판해 왔다는 점에서 그 관심과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그 노하우가 다른 대량생산 모델들의 스포츠화에도 활용될 필요가 있겠다. 아반떼 스포츠는 일반 아반떼의 높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스포츠”라는 서브 네임에 손색 없는 달리기 실력을 선보였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놀라움 반, 아쉬움 반이었다. 뇌쇄적인 외모와 숙련된 파워트레인, 눈부신 완성도의 서스펜션과 뛰어난 제동력 등은 박수를 쳐줄 만 하지만 쓸데없이 높은 시트 포지션, 적극성이 결여된 DCT나 스티어링의 반응, 스포츠 모델을 자처하면서도 컴포트형 UHP 타이어를 적용하는 구성 등에서는 실망이 남는다. 달성하기 어려운 것들을 해내고서는 마무리가 어설퍼 전체적인 완성도에 흠집을 남긴다.
현대차는 시승에 앞서 차량을 소개하면서 상품 기획과 마케팅에 관한 프레젠테이션만 선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세팅이 다른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개발했는 지 이야기를 들려 줄 개발자들은 만나볼 수 없었다.
고성능 모델은 애당초 수익성보다는 기술력 강조를 통한 브랜드 이미지 제고의 역할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스포츠 모델을 만들어 놓고 마케팅의 시선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함이 남았다. 결국 한 끗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경험과 연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마케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반떼 스포츠의 가격은 수동이 1,963만 원, DCT가 2,158만 원이며 편의사양과 튜익스 패키지가 적용된 익스트림 셀렉션은 2,41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