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지로버 이보크가 페이스리프트 모델로 돌아왔다. 레인지로버 이보크는 작은 차체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는 ‘컴팩트 럭셔리 SUV’라는 장르를 열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아니면 쉽게 구입하기 힘든 모델로 인식됐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공은 물론 국내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랜드로버의 귀한 막내 도련님, 이보크가 앞뒤 디자인을 조금 고치고, 그룹 내 모듈러 엔진인 인제니움 엔진을 얹고 돌아 온 것이다.
쉽게 ‘이보크’라고 부르는 이 모델의 정식이름은 ‘레인지로버 이보크’다. 분명 랜드로버 브랜드 내에서 가장 막내, 가장 작은 SUV인데도 이름에 ‘레인지로버’가 붙는다. 레인지로버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랜드로버 브랜드 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호화롭고, 가장 비싼 모델이다.
랜드로버 브랜드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인지로버, 디스커버리, 프리랜더, 그리고 디펜더 이렇게 4개의 모델로 구성됐었지만, 최근에 라인업이 새롭게 정리 됐다. 이제는 랜드로버 내에 레인지로버, 디스커버리, 그리고 디펜더 이렇게 3개의 모델 라인업이 존재하고, 각 모델 마다 다시 세부 모델이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냥 가지치기 모델이 아니라 세부 모델이 더해져 각 모델이 일종의 브랜드 역할을 하게 했다.
레인지로버 내에는 레인지로버, 레인지로버 스포츠, 레인지로버 이보크 이렇게 3개의 세부 모델이 존재하고, 디스커버리 내에는 디스커버리와 디스커버리 스포츠 이렇게 2개의 세부 모델이 존재한다. 각 모델 라인에 스포츠 모델이 추가된 것이 특징이고, 레인지로버에는 이보크가 하나 더 자리 잡았다. 과거 프리랜더는 디스커버리 스포츠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새로 개발된 모델이긴 하지만 말이다. 디펜더는 예전처럼 가지치기 모델들로 구성됐다.
이제는 나름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조금 더 조율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첫 스포츠 모델인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처음엔 레인지로버가 아닌 디스커버리 플랫폼에서 개발됐다가 2세대에서는 레인지로버 플랫폼으로 바뀌면서 레인지로버와 레인지로버 스포츠는 같은 플랫폼에서 성격이 다른 모델로 정의됐다. 그런데 디스커버리와 디스커버리 스포츠에는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 프리랜더의 후속 모델 정도로 개발된 모델에 디스커버리 스포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즉, 두 개의 스포츠 모델의 존재감이 조금 다르다는 말이다. 향 후 더 세분화된 모델이 나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율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모델 세분화의 첫 신호탄이 된 모델이 이보크로, 기존에 없던 레인지로버 세부 모델로 등장한 것이다. 분명 차체는 랜드로버 중 가장 작은데 장비는 무척이나 럭셔리하고, 이름에도 레인지로버를 붙였다.
이보크는 국내 출시와 함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차체 사이즈나 성능 대비 가격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내 외장 디자인과 크게 부족하지 않은 파워트레인을 갖추고 있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가격표를 보고는 어느 누구도 선뜻 구매하기 힘든 가격이었던 것이다. BMW X1 정도의 크기와 파워트레인을 갖춘 모델인데, 가격은 X3 상위 모델 수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때문에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의 가격 정책이 잘못됐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는 동안 판매는 꾸준히 지속됐다. 랜드로버라는 브랜드 파워와 뛰어난 디자인에 끌린 소비자들이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하는 이들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물론 딜러들의 파격적인 가격 할인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판매가 꾸준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실제로 국내로 들어오는 물량은 재고를 모두 소진해 가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판매는 더 높아 지금까지 39만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 모델이 됐다.
결국 레인지로버 이보크는 ‘컴팩트 럭셔리 SUV’로 자리를 잡았다. BMW가 뉴 미니를 선보이면서 구사한 ‘럭셔리 컴팩트카’ 전략이 고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처럼, 비록 미니 가격의 2배가 넘는 SUV이긴 하지만 이보크 역시 컴팩트 럭셔리 SUV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보크를 타는 이들은 상당한 부자라는 인식도 생겨나고 있다. 퍼스트 카로 사용할 SUV로 이보크는 적합하지 않다. 그 가격이면 더 윗급의 독일산 SUV 구입도 가능하니 이보크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이보크를 구입한 사람은 가격에 크게 구애 받지 않거나, 이미 다른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비싸지만 이보크의 매력 때문에 무리해서 산 사람들일 것이다.
이보크가 이처럼 컴팩트 럭셔리 SUV로 자리 잡은 데는 랜드로버라는 높은 브랜드 파워와 뛰어난 디자인,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고급스러운 실내, 그리고 이보크를 대체할 경쟁자가 없다는 점등을 들 수 있다. 럭셔리 컴팩트 SUV로는 포르쉐 마칸 정도가 있는데 마칸은 성능도 더 높고 가격도 더 높다. 컴팩트 럭셔리 SUV는 원하지만 굳이 고성능이 필요치 않은 이들에겐 역시 이보크 밖에 없는 것이다.
페이스리프트 된 이보크는 앞 모습이 살짝 바뀌었다. 라디에이터 그릴에 테두리가 생기고 안쪽은 허니콤 타입으로 바뀌었다. 헤드램프는 트림에 따라 풀 LED 헤드램프가 새롭게 적용됐는데, LED 헤드램프가 적용된 경우 전체적으로 훨씬 날렵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 그리고 범퍼 좌우 공기 흡입구가 더 커졌고, 범퍼 아래쪽 형상도 조금 바뀌었다.
리어 램프도 원형이던 안쪽 형상이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디자인의 변화는 미미한 편이다.
실내는 바뀐 부분이 아예 없다. 작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유지됐다. 데시보드와 도어 트림 등 곳곳을 가죽으로 덮었고, 스티치를 노출시켜 고급스러움을 극대화했다.
‘T’ 형태를 이루는 데시보드와 센터페시아 형상은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라인을 선보인다. 터치 스크린이 지원되는 센퍼 페시아 상단 모니터는 다소 깊숙이 자리잡은 데다 각도 조절이 잘 이뤄져 창문이나 썬루프 반사가 일어나지 않고 항상 선명한 화면을 유지한다.
각종 메뉴는 좌우에 배치된 메뉴 버튼과 터치 스크린을 활용해 편리하게 조작이 가능하고, 네비게이션도 터치 스크린과 함께 지니맵이 적용돼 사용하기 무척 편리하다.
오디오는 재규어, 랜드로버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메리디안 오디오가 적용돼 매우 뛰어난 음질을 선사한다. 오디오 성능이 뛰어난 만큼 음원에 따른 음질 차이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외부 소음이 커지는 주행 중에는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정차 중에 들으면 아무래도 블루투스 스트리밍 시에는 음질 손실이 약간 느껴진다.
2개의 파이프 타입 계기판과 그립감이 뛰어난 스티어링 휠, 조각감이 선명한 시프트 패들 등도 고급스러운 실내와 잘 어울린다. 스티어링 휠 가운데 패드 좌우에 날개처럼 2단으로 배열된 각종 리모컨 버튼들도 사용하기 편리하다.
센터페시아에서 센터터널로 이어지는 경사면에 위치한 변속기 다이얼은 시동이 걸리면 솟아 오르는데 부드럽게 솟아오르는 움직임이 일품이다. 변속기 다이얼 아래에는 오프로드 주행을 극대화해 주는 터레인리스폰스가 자리하고 있다.
시승차는 마침 인테리어에 빨간색 가죽이 적용됐는데, 시트와 도어 트림을 장식한 빨간 가죽의 화려함이 이보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다. 시트는 디자인이 멋지고 몸도 잘 잡아준다. 통풍기능은 지원되지 않는다.
엔진은 재규어 XE를 통해 먼저 선보인 인제니움 2.0 디젤 엔진이 적용됐다. 올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인제니움 엔진은 소음과 진동이 줄었고 연비는 높아졌다. 최고출력은 180마력, 최대토크는 43.9kg.m를 발휘한다. 이전에는 2.2 디젤 엔진으로 최고출력 190마력, 최대토크 42.8kg.m를 발휘했었다. 이전에 비해 배기량은 줄면서 출력은 10마력 줄었고, 토크는 오히려 1.1kg.m 늘었다.
변속기는 지난 번에 세계 최초로 적용됐던 자동 9단 변속기가 그대로 적용됐고, 연비는 13.3km/l에서 13.8km/l로 소폭 향상됐다.
컴팩트 SUV이긴 하지만 그래도 체중이 2톤에 육박하는 지라 2.0 디젤 엔진으로 강력한 가속을 뿜어내기는 무리다. 제원상 0~100km/h 가속에 9초가 걸리는데, 실제 느낌은 9초에 살짝 못 미치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시트 포지션이 높은 SUV의 특성상 체감 가속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전 모델이 8.5초가 걸린 것을 감안하면 불과 0.5초이긴 해도 살짝 아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가속감이 굼뜨거나 하지는 않다. 덩치에 딱 맞는 파워로 부족함 없는 가속을 보여준다. 사실 9초의 가속력이면 결코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중속에서의 재가속에서는 매우 두터운 토크감을 맛볼 수 있다. 고속영역까지도 꾸준하게 속도를 밀어 준다. 변속기가 9단으로 높아지다 보니 순항 시 회전수는 매우 낮아졌다. 100km/h를 9단으로 주행할 때 회전수는 약 1,350rpm 수준이다.
시프트 패들을 사용해 기어를 내릴 때 회전수 보정은 빠르고 매끄럽게 잘 마무리해준다. 변속기 다이얼을 살짝 누른 후 오른쪽으로 한 번 더 돌리면 스포츠모드가 되고, 이 때는 항상 높은 회전수와 토크를 유지하도록 기어 변환을 늦춰주고, 낮은 기어를 선택해 주므로 주행 중 언제든지 강한 토크감을 맛보며 주행할 수 있다. 도심이나 순환도로 등에서 경쾌하게 주행하고 싶을 때 제격이다.
이보크의 장점 중 또 하나는 매우 뛰어난 주행 질감이다. 때로 살짝 단단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면서 또한 부드럽다. 안정감과 승차감의 조화가 매우 뛰어나다. 평소에 부드럽게 주행할 경우 아주 고급스러운 주행감각을 즐길 수 있다.
터레인리스폰스는 별도의 4륜구동 장치 조작 없이 미리 마련된 모드만 선택해 주면 차가 알아서 최적의 구동력을 발휘해 준다. 다이나믹(dynamic) / 일반(general) / 풀, 자갈, 눈길 (grass, gravel, snow) / 진흙(mud-ruts) / 모래(sand), 이렇게 5가지의 주행모드가 마련돼 있다.
이보크는 상대적으로 최저 지상고가 낮아, 에어 서스펜션 등으로 지상고를 높일 수도 있는 모델들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험로 탈출 능력이 낮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랜드로버 가(家)의 도련님답게 오프로드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 오프로드 체험 주행에 나서면 레인지로버나 디스커버리를 잘도 따라 다닌다.
레인지로버 이보크는 무척 매력적인 모델이다. 가문 좋고, 외모 뛰어나고, 똑똑하고,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최고급 명품 수트까지 걸친 그야말로 부잣집 막내 도련님 같은 모델이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조금 까칠한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다. 하지만 그들의 리그에서는 그것도 큰 흠이 되지는 못한다. 비록 그들의 리그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레인지로버 이보크는 참 갖고 싶은 차다.
가격 외에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이보크에 고성능 버전을 추가하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이보크 만으로는 명품 이미지를 이어가기가 조금은 부족해 보인다. 3.0 가솔린 터보 엔진 정도를 얹은 고성능 모델이 있어서 이미지를 이끌어 준다면 이보크는 좀 더 명품 모델로 자리 잡기가 쉬워질 것이고, 물론 실제 볼륨 모델인 2.0 디젤 모델의 판매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같은 첨단 장비도 빠짐없이 갖출 필요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