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편일률적인 차종 뿐이었던 한국 자동차 시장이 수입차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차가 작아보인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해치백은 실속있는 컴팩트 카의 대명사가 됐고, 개성 넘치는 소형 SUV와 독특한 패션 카들도 인기를 끈다. 수백 마력을 내는 고성능 모델과 고가의 스포츠 카도 예전에 비해 길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해외 자동차 업체들의 시선이 한국으로 쏠리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이렇게 달라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명제 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한국은 왜건의 무덤”이라는 것. 세단과 같은 주행 감각에 SUV를 뛰어넘는 실용성을 갖춘 왜건은 기자들과 자동차 매니아들에게는 늘 인기 차종이지만, 유독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인기를 끌지 못한다. 지난 십 수 년간 여러 브랜드들이 야심차게 선보였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왜건들을 이루 헤아리기도 어렵다.
간만에 새로 등판한 왜건은, 예상 외로 메르세데스-벤츠 출신이다. 컴팩트 세단 C-클래스를 위한 에스테이트 모델을 국내에 정식 출시한 것. 브랜드 내에서는 CLS-클래스 슈팅 브레이크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선보이는 왜건 모델이다. 디젤 엔진과 4매틱 4륜구동 시스템이 조합된 단일 트림으로 시판됐다.
메르세데스-벤츠는 한국에서 RV 판매가 급성장하는 만큼, 왜건 역시 곧 인기몰이를 하리라 기대 중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게임은 아니다. 이미 같은 기대를 걸었던 많은 선구자들이 쓰라린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에게 과연 낯선 세 꼭지 별의 왜건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C 220d 에스테이트 역시 세단에 기반하기 때문에, 앞에서는 무엇이 다른 지 쉬 알아챌 수 없다. 이제 완전한 패밀리 룩이 된 전면부는 단정하고 우아하다. 거대한 엠블렘을 중심으로 두 줄의 장식이 더해진 라디에이터 그릴은 권위적인 분위기 대신 역동성을 더해 이 차의 활동적인 면모를 강조한다.
그런데 바디 라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B 필러를 지나면서 깜짝 놀랄 반전이 시작된다. 매끈하게 이어진 루프는 테일게이트로 연결되며 무게 중심을 한껏 뒤로 뺀다. 흔히 생각하는 왜건의 비례에 비해 제법 스포티하다. 노즈가 긴 세단의 디자인을 활용하면서도 전장을 크게 늘리지 않은 덕이다. 전장*전폭*전고는 4,702*1,810*1,465(mm)로, C-클래스 세단보다 2mm 길고 20mm 높다. 휠베이스는 2,840mm로 동일하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대신 포물선을 그리는 트렁크 리드에서는 세단과 전혀 다른 테일램프 디자인이 차별화된다. 최근 데뷔한 SUV, GLC-클래스와 닮아 있다. 경쟁 모델인 BMW 3 시리즈 투어링이 바닥에 깔린 느낌을 주는 것과는 달리 한껏 힙업(hip-up)시켜 SUV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독특하다.
시승차는 베이지 가죽 인테리어가 적용됐다. 청바지를 입고 타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보기에는 근사하다. 놀라운 마감 품질과 탁월한 소재의 재질감은 영락없는 메르세데스-벤츠다. 일반 세단과 구분되는 것은 모니터 속 차량 그래픽이 에스테이트라는 점 뿐이다. 어느 누가 감히 이 차의 실내를 보고 짐차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나 가죽과 우드 트림이 일품이다. 나뭇결을 살린 우드 트림은 센터페시아와 도어에 적용되며, 보드러운 가죽은 시트 뿐 아니라 손이 닿는 곳에 꼼꼼히 덮혀 있다. 동급 경쟁 모델 중 C-클래스보다 우수한 마감 품질을 갖춘 모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반면 다이얼 외의 버튼 조작감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저렴한 느낌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답게 전형적인 칼럼식 시프트 레버가 적용됐고, 탁 트인 센터페시아에는 커맨드 조작 스위치가 위치하고 있다. 여전히 내비게이션은 사용하기 까다롭지만, 조금씩 개선되는 것이 느껴진다. 다만 멀리 떨어진 비상등 위치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탑재되긴 했지만, BMW의 것처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미 C-클래스의 인테리어는 익숙하니, 에스테이트만의 장기인 트렁크를 확인해 보자. 기본적으로 490L의 트렁크 용량을 자랑하는데, 폴딩 시에는 무려 1,510L의 공간이 생긴다. 40:20:40으로 분할된 시트는 전자식 릴리즈로 한 번에 폴딩되는데, 빠르긴 하지만 점잖지 못하다. 차라리 렉서스 NX처럼 전동식으로 접히면 어땠을까 싶다.
전동식 테일게이트가 열릴 때 적재함 칸막이가 전동으로 딸려 올라가 짐을 싣고 내리기 편하게 해 주는 기능은 제법 놀랍다. 트렁크 하단에는 접이식 플라스틱 박스가 수납돼 있는데, 트렁크 정리에 활용하면 좋겠다.
파워트레인은 익숙한 2.2L 직렬 4기통 디젤 엔진이다. 최고출력 170마력, 최대토크 40.8kg.m을 발휘하는 이 엔진은 이미 C-클래스 세단은 물론 E-클래스, 인피니티 Q50 등 여러 모델들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변속기는 7속 자동변속기가 채택됐으며, 4매틱 4륜구동 시스템이 탑재돼 구동력을 배분한다.
엔진의 반응은 역시나 여유가 넘친다. 스포티한 주행 성능을 강조하는 여러 경쟁 모델들이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기민하게 반응하도록 세팅된 반면, C 220d 에스테이트는 우아한 숨고르기 후 차분한 가속을 시작한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그시 뿜어져 나오는 토크는 운전자가 실망하기 전에 뒷심을 발휘한다. 꼭 제원 상 출력 만큼의 힘을 내는 것이 영 아쉽긴 하다.
가장 큰 경쟁 모델인 320d와 비교하자면, 공회전 중의 소음 진동은 조금 더 큰 편이지만 오히려 회전수를 높이고 주행에 돌입하면 금새 부드러워진다. 변속기 또한 빠른 변속보다는 부드러운 변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담한 패들 시프트를 갖추고 있지만, 강제로 변속되지 않는 완전한 수동 모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단에 비해 지상고가 소폭 높아졌음에도 휘청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넘어 제법 탄탄한 하체에 놀라게 된다. 되려 세단보다 탄탄하게 느껴지는 하체가 코너에서도 자세를 잘 유지해 준다. 왜건의 구조적 특성 상 뒷쪽이 무거워 디젤 엔진의 헤비 프론트를 보완해 준다. 밸런스가 더 좋다는 뜻이다. 스티어링 휠도 제법 묵직해 주행 안정성도 좋다.
매끄러운 가속과 탄탄한 하체가 맞물리니 운전이 퍽 재미있다. 역시 손맛 만큼은 컴팩트 세단의 것 그대로다. 에코-컴포트-스포츠-스포츠 플러스 등 주행 모드를 바꾸면 차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진다. 연비를 위해 모든 반응을 둔하게 만드는 에코와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는 컴포트에 비해 스포츠는 스티어링 휠 반응이 더 무거워지고 가속은 빨라진다. 스포츠 플러스에서는 전자장비를 끄며 공격적인 주행을 즐기도록 도와준다.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컴포트가 가장 좋고, 스포츠로만 바꾸더라도 제법 짜릿하다.
C 220d 에스테이트의 공인 연비는 복합 13.5km/L이지만, 시승 간 연비를 고려하지 않은 복합 연비는 15km/L에 달했다. 연비에 좀 더 신경쓴다면, 그리고 고속 주행이 많은 편이라면 보다 좋은 연비를 기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4매틱인 것을 감안하면 꽤나 준수한 연비다.
C 220d 에스테이트는 명불허전 메르세데스-벤츠답게 잘 만들어진 왜건이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프리미엄 왜건의 수요가 극히 적지만, 독보적인 우아함과 실용성을 두루 갖춰 장기적으로 프리미엄 컴팩트 왜건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겠다. 관건은, 왜건이 대관절 언제쯤 인기를 끌 수 있냐는 것이다.
왜건이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것은 결국 라이프 스타일에 기인한다. 육로로 국경을 넘기 쉬운 유럽에서는 긴 휴가시즌을 활용해 자동차에 짐을 싣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높은 인건비 때문에 직접 자재를 구입해 집이나 시설을 보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간활용도가 높은 차량을 선호하게 됐다. 하지만 비싼 유류비와 좁은 도로환경으로 인해 미국처럼 풀사이즈 SUV나 미니밴을 선택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컴팩트한 차체와 넓은 공간을 두루 갖춘 왜건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당연히 육로 여행이 제한적이고 일상 생활에서 큰 짐을 싣을 일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짐차” 이미지가 강한 왜건이 사랑받기 어렵다. 그러나 직접 타 보면 꽤나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장을 본 뒤 트렁크의 짐을 정리하지 않고도 손쉽게 적재할 수 있고, 시트를 접지 않고도 유모차를 수납할 수 있으며, 여차하면 원룸 이삿짐 정도는 직접 나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낮고 민첩한 세단의 주행 감각을 그대로 지닌 것이 큰 특징이자 메리트다. 결국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등한시하는 것이다. 고가의 자동차를 선택하면서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세그먼트를 선택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단언컨대 왜건은 분명 한국에서도 매력적으로 탈 수 있는 차다. 그 왜건이 메르세데스-벤츠라면 더욱 그렇다. 평소에는 손쉽게 짐을 나르는 실용주의자였다가도, 마음 내킬때면 언제든 온 가족의 짐을 싣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우아한 여행자의 차다. 아직까지 흔치 않은 만큼 도로 위에서 빛나는 희소성은 덤이다.
C-클래스 구매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반드시 에스테이트를 함께 살펴보라.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줄 새로운 차를 맞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 세단보다 150만 원을 더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 걸린다. C 220d 4매틱 에스테이트의 가격은 6,10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