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앞서 휴가 시즌에 두어 번 여행을 다녀 왔지만, 문득 올해 들어서는 한 번도 제대로 바다 구경을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취재를 위해 몇 차례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여유를 갖고 바닷내음을 맡아본 지가 오래였다. 여름 하면 바다 아니겠는가? 올 여름이 다 지나기 전에 바다를 다녀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 짐을 싸고, 함께 떠날 사람들을 모았다. 목적지는 깊고 푸른 동해 바다로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태풍 “고니”가 동해안을 따라 올라온다는 소식이었다. 300mm의 폭우를 쏟아 붓는 태풍 속에서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긴급 대책회의(?)가 소집됐고, 논의 끝에 대한민국 제 2의 도시, 부산으로 행선지를 변경했다. 그리고 시트로엥 그랜드 C4 피카소 1.6이 이 뜻밖의 여행에 동참하게 됐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그랜드 C4 피카소 1.6은 기존 2.0 모델과 내·외관 상 큰 차이가 없지만, 효율적이면서도 토크가 넉넉한 1.6L 디젤 엔진을 탑재해 실속을 높였고, 한국 푸조 시트로엥 중에는 308에 이어 두 번째로 1.6 엔진에 토크컨버터 자동변속기를 결합시켜 더욱 부드러운 주행감각이 장점이다. 다섯 남자와 함께 부산을 달리며 그랜드 C4 피카소 1.6의 가치를 확인해 봤다.
자동차 여행이라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여행도 자동차의 “운송”이라는 기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타고, 짐을 싣고, 목적지까지 잘 운행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탑승객들이 장거리 주행에서 얼마나 쾌적한 시간을 보낼 지, 짐을 적재할 때 공간은 충분한 지 등이 관건이 될 뿐이다. 혼자 시승을 할 때는 결코 쉽게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다.
그런 부분에서 그랜드 C4 피카소는 탁월한 여행의 동반자다. 전위적인 특유의 디자인이 낯설 수 있지만, 보다보면 비례나 양감, 디테일이 퍽 세련됐다는 것이 느껴진다. 디테일에 집착해 밸런스가 무너지는 일본차나 잘 생겼지만 심심한 독일차와는 다르다. 프랑스인들의 과감한 예술 감각을 여지 없이 표현한 차가 바로 그랜드 C4 피카소다. 뭉툭하고 밋밋하기 마련인 MPV를 이렇게 세련되게 꾸미는 것도 재주다. 스페인에서 나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장*전폭*전고는 4,600*1,825*1,635(mm), 휠베이스는 2,840mm로, 국내 시장에서 수입 모델 중에는 경쟁자가 없는 7인승 미니밴이다. 국산차까지 비교대상에 포함하면 기아 카렌스, 쉐보레 올란도 등과 비슷한 세그먼트인데, 카렌스보다는 크고 올란도보다는 조금 작다. 하지만 휠베이스는 가장 길어 실내 공간에서 우위를 점한다. 푸조 308 등과 같은 차세대 EMP2 플랫폼을 공유해 경량 고강성을 실현한 것도 특징.
외관 상 기존 2.0 모델과 다른 부분은 보다 작은 직경의 알로이 휠 뿐이다. 조금 덜 멋있지만, 대신 효율을 높이고 필요충분의 출력을 최적으로 활용하도록 돕는다. 반면 근사하고 효율도 좋은 3D LED 테일램프는 그대로 유지되는 등 2.0 상위 트림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점이 매력이다.
독특한 실내공간은 그랜드 C4 피카소 최고의 자랑거리다. 컴팩트한 차체에도 불구하고 넓은 전면 윈드실드와 두 갈래로 갈라진 A-필러 등이 탁 트인 공간감을 조성해 답답한 느낌을 받기 어렵다. 버튼을 최소화해 많은 기능을 7인치 터치식 디스플레이로 집어넣고 대쉬보드를 볼륨감 넘치게 디자인한 것도 실내를 넓어보이게 만든다. 이전에 C4 피카소를 시승할 때는 디스플레이의 현지화와 최적화가 부족해 아쉬웠는데, 이제는 모든 기능이 수월하게 작동하며 한글화된 메뉴도 제공한다. 단, 터치 인식도가 떨어지는 점은 흠이다.
착석감은 지극히 승용차같다. 시트 포지션은 높지만 자세를 잘 잡아주고, 직경이 작은 스티어링 휠은 운전하기에 꼭 맞다. 기계식 계기판은 배제하고 12인치 디스플레이를 차체 중앙에 배치해 속도계와 타코미터, 차량 정보 인디케이터 기능을 겸한다. 이 차는 가족을 위한 차인 만큼, 조수석과 뒷좌석의 승객들이 주행 정보를 공유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시승 내내 이 차에는 건장한 성인 남성 5명이 탔다. 각자 챙겨 온 가방도 포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부족함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트렁크에 여러 개의 가방을 꽉꽉 밀어넣은 뒤에도 2열 시트는 독립적으로 슬라이딩과 리클라이닝이 가능하다. 2열 레그룸이 객관적으로 매우 넓은 편은 아니지만, 4시간이 넘는 주행에도 심한 피로감은 없었다. 특히 2열 가운데 좌석도 평평한 바닥과 독립된 시트 형상 덕분에 여타 모델보다 훨씬 안락하다.
3열 시트는 짧은 여행 중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확인해 본 바로는 잠시 앉아 가기에 충분하다. 넉넉한 공간이 아니라 어린 아이나 체구가 작은 승객이 타야 큰 불편함이 없겠다. 단, 3열 시트를 일으켜 세우면 적재 공간을 거의 포기해야 한다. 적재 공간은 기본 645L, 2열 시트 슬라이딩 시 700L 이상이며, 2열 시트를 모두 접으면 1,843L로 크게 늘어난다. 물론, 2열 시트는 3개가 독립적으로 폴딩이 가능하므로 다양하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실내 곳곳에는 매력적인 배려가 숨어 있다. 가령 2열 바닥 매트 아래에는 신발 한 켤레가 충분히 들어가는 숨겨진 수납공간이 있고, B 필러 뒷편에는 2열에서 풍량 조절이 가능한 송풍구가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1열 시트 뒷면에는 접이식 선반이 있어 장거리 여행 중 요기를 할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이 타고 레저를 즐기기에 최적화됐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처럼 세세한 배려 덕이다.
여행 당일, 짐을 모두 실은 그랜드 C4 피카소는 다섯 사람을 태우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사실 출발하면서 걱정이 앞섰다. 1.6L 엔진의 성능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새로운 1.6L 직렬4기통 BlueHDi 디젤 엔진은 앞서 푸조 308 1.6에 탑재된 것과 같은 사양이다. 최고출력 120마력, 최대토크 30.6kg.m을 발휘하며, 아이신제 6속 토크컨버터 자동변속기와 결합된다. 앞서 PSA는 호불호가 갈리던 MCP/ETG 변속기를 토크컨버터로 대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랜드 C4 피카소 역시 새로운 변속기를 채택해 부드러운 변속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막상 고속도로에 올라가니, 우려와 달리 1.6 엔진은 별로 답답하지 않았다. 최대토크가 실용 영역인 1,750rpm부터 발휘되기 때문에 고회전을 쥐어 짤 필요도 없다. 특히 기어비가 매우 길게 세팅돼 있어 속도를 높여도 회전수는 낮게 유지된다. 긴 기어비는 추월가속을 희생하는 대신 일단 속도를 붙여놓으면 매우 우수한 연비를 유지했다. 오르막에서는 넉넉한 초반 토크가 기어비를 만회해 준다.
이처럼 잘 조율된 세팅은 효율 면에서 빛을 발한다. 공인연비는 복합 15.1km/L, 고속 16.7km/L, 도심 14.0km/L이다. 여느 푸조 시트로엥 모델과 마찬가지로, 이 공인연비는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1,000km 이상을 주행한 이번 시승에서 최종 복합 연비는 16.1km/L을 기록했고, 고속 연비는 18.5km/L, 시내 연비는 15.5km/L을 기록했다. 탑승객과 짐이 가득 차 있었고, 시승 내내 에어컨이 풀 가동 중이었으며, 심지어 연비를 의식하지 않고 주행했음에도 공인연비를 크게 상회했다. 우수한 효율은 당연히 장거리 주행의 부담도 덜어 준다.
엔진이 작아지면서 얻는 잇점은 효율 뿐이 아니다. 자연히 디젤 특유의 소음 진동도 줄어들었다. 필요충분의 성능은 유지하면서 안락함은 오히려 개선된 셈이다. 또 차가 정차하는 순간 스톱 앤 스타트 시스템이 재빨리 시동을 꺼 연료 낭비와 진동 스트레스를 막아주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부드럽게 시동을 걸어준다. 푸조 시트로엥의 스톱 앤 스타트 시스템 완성도는 세계 최고수준으로, 오히려 독일차와 비교해봐도 훨씬 부드럽고 충격도 적다.
주행 감각은 시종일관 안락하면서도, 프랑스 차만의 탄탄한 기본기가 돋보인다. 편평비가 높고 접지력이 떨어지는 에코 타이어를 장착했음에도 고속 안정성은 놀라운 수준으로 유지되고, 잔진동을 기분 좋게 걸러주며 요철을 통과한다. 롤링은 잘 억제되고, 전장이 더 길고 엔진이 가벼워진 덕인지 C4 피카소와 비교했을 때 피칭도 훨씬 적다. 시내에서는 깔끔한 충격 흡수가, 고속에서는 노면에 가라앉는 듯한 우수한 안정감이 일품이다. 일반적인 MPV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우수한 하체 세팅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이라 하면 고속도로 주행을 떠올리지만, 행선지에 도착한 뒤에는 주행 패턴이 바뀐다. 특히 부산의 경우 서울에 비해 차선이 좁고 복잡한 도로가 많다. 번화가에 갈 요량이면 복잡한 이면도로를 지나는 일도 많았다. 5m가 넘는 미니밴이라면 이런 좁은 길을 지나기 난감한 경우가 있었겠지만, 그랜드 C4 피카소는 차체가 작기 때문에 바디 사이즈에서 오는 괴리감도 거의 없다. 일반 중형 세단 정도를 운전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주행이 가능하다. 보다 협소한 시골길 등을 지날 때라면 더욱 만족도가 높겠다.
시승 스케줄 상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랜드 C4 피카소의 가치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랜드 C4 피카소는 시종일관 안락하고, 경쾌하며, 효율적이다. 성인 남성 5명이 타기에도 충분했던 만큼, 어린 아이를 동반한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이라면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겠다. 특히 주행 성능을 보다 최적화시킨 1.6L 엔진은 유지 면에서도 이득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행 성능이 답답할 정도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부산 사투리로 “살아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어디 하나 크게 흠 잡을 곳이 안 보인다. 1.6 모델은 ‘인텐시브’ 단일 트림으로, 가격대 역시 3,990만 원으로 낮아져 이전보다 접근성이 좋아졌다.
비단 그랜드 C4 피카소 뿐 아니라, 푸조 시트로엥이 한국에 선보이고 있는 모델들의 상품성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끊임없이 고성능화, 대형화되고 있는 작금의 업계에서, 오히려 꼭 필요한 성능을 갖추고 실속을 챙기는 푸조 시트로엥의 참신한 시도가 유독 사랑스럽다. 자동차로 하여금 과시의 수단이 아닌, 운전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최적화된 동반자로 자리잡도록 하는 데에도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가치가 숨어 있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스타일리쉬하고 실속 있는 그랜드 C4 피카소 1.6은 여행을 더욱 값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다섯 남자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고, 계절에 따라 어디든 떠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름 휴가철은 지났지만, 여행을 동경하는 이라면 그랜드 C4 피카소는여러 모로 이상적인 패밀리 카이자, 여행의 동반자가 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