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매우 독특하다. 미국차의 크고 넓은 공간을 선호하면서도 최근에 들어서는 유럽에서 인기있는 디젤 엔진의 비중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실내 품질과 편의사양에 관해서는 양보 없이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성공하면 세계에서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선택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수준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선택 속에서 시장의 흐름에 제때 발 맞추지 못하고 도태되는 브랜드도 적지 않다. 특히 비교적 최근까지 낮은 효율과 조악한 실내 품질, 빈약한 편의사양 때문에 미국차들은 “크기만 하고 실속 없는 차”라는 불명예를 떠안아야 했다. 독일을 위시한 유럽차들의 약진, 일본차의 꾸준한 성장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옛 말이 됐다. 경제위기를 겪으며 혹독한 체질 개선에 나선 미국차는 이제 예전같지 않다. 물론 이 말은 칭찬이다. 이제 미국차들은 디젤 엔진 투입에도 망설임이 없고, 타국의 경쟁자들 못지 않게 고급스러운 마감과 호화로운 편의장비를 둘렀다. 여기에 미국차만의 넉넉한 공간과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호화로운 디자인은 미국산 고급차의 명성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얼마 전 얼굴을 고치고 등장한 크라이슬러 300C도 미국산 고급차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전에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고급차라 칭하기 어려운 실내 마감때문에 빛 좋은 개살구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불과 페이스리프트일 뿐인데, 300C의 품질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유럽차로 뒤덮힌 수입차 업계에서 아메리칸 럭셔리의 기상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공교롭게도 한국에는 미국 주요 브랜드의 플래그십 모델이 모두 모여 있다. 북미 외의 시장에서 북미 플래그십 세단들이 모두 경쟁하는 시장은 드물다. 포드 토러스와 링컨 MKS가 전륜구동 대형 세단의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반면, GM의 캐딜락은 유럽차와의 경쟁을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최근 투입된 쉐보레 임팔라는 국산 전륜구동 준대형 세단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아메리칸 세단이 포진하고 있는 한국 시장에서 300C의 위상은 어떨까? 메르세데스-벤츠와의 협력관계에서 탄생한 LX 플랫폼과 V6 엔진에 후륜구동 기반 AWD. 이런 레이아웃을 보면 지극히 유럽차에 가까울 것 같지만, 오히려 300C에서는 옛 미국차의 정취가 느껴진다. 대배기량 엔진을 얹은 후륜구동 머슬카들 말이다. 미국 경쟁 브랜드들 중 크라이슬러만큼 고전적인 미국차의 색채가 진한 브랜드도 없을 것이다.
외관은 부분 변경 이전보다 화려해 졌다. 라디에이터 그릴 면적을 키우고, 200에 적용됐던 날개 형태의 안개등 주변 장식을 더했다. 테일램프 형태도 보다 깔끔해졌다. 큰 변화는 없지만 단정하다 못해 의기소침해 보였던 이전 모델보다는 훨씬 당당해 보인다. “킹스맨”의 영국 요원처럼 깐깐한 재규어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본트랩 대령처럼 진지한 독일차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인 억만장자 개츠비처럼 여유가 넘치지만, 그 이면에는 함부로 넘보지 못할 권위와 무게감이 느껴진다.
지극히 미국차다운 19인치 크롬 휠을 비롯해 도어 그립과 사이드미러 커버, 리어 범퍼 라인 등에 크롬 장식이 더해졌지만, 촌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차체의 각진 라인들을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리어 머플러 팁도 안개등 주변의 디테일과 통일감이 느껴지도록 사다리꼴 형태로 수정돼면서 세련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실내도 큰 틀의 변화보다는 기존 레이아웃을 유지하되 품질을 높이는 데에 집중했다. 300C의 실내 디자인은 미국 워즈오토가 선정한 10대 베스트 인테리어에 선정될 만큼 깔끔하고 직관적이다. FCA 체제 이후 이탈리아의 장인정신을 받아들인 실내 품질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내장재의 단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트림이나 가죽의 재질감도 고급스럽다. 다만 여전히 떨어지는 마감 품질과 버튼의 조작감 등은 향후 개선 과제다.
운전석에는 여러 부분의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은 스티어링 휠 형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답답해 보였던 4-스포크 스티어링 휠은 세련된 3-스포크 타입으로 바뀌었다. 그 너머의 계기판도 앞서 200에서 선보인 것과 같은 파란 조명의 입체감있는 디자인으로 바뀌었고, 중앙에는 7인치 디스플레이가 탑재됐다.
T자형 시프트 레버는 부분변경과 함께 시프트 다이얼로 바뀌었는데, 개인적으로는 300C 특유의 당당한 분위기에는 이전 디자인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다이얼에는 수동 모드가 없고 S 모드가 있지만, 다행히도 200과 달리 패들 시프트가 달려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변속이 가능하다.
눈에 띄는 기능 중 하나가 냉온장 기능이 내장된 1열 컵홀더다. 컵홀더 옆 작은 버튼을 누르면 냉장 또는 온장 기능이 작동하는데, 냉장 시에는 얼음잔을 넣어두면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고, 온장 시에는 뜨거운 커피가 식지 않는다. 좌우 분리 작동하는 이 기능은 실내의 여러 편의장비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고, 300C가 운전자에게 보다 집중된 차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300C를 타고 도로에 나서면 어딘가 모르게 여유가 생긴다. 작고 민첩한 차를 타면 자꾸만 내달리고 싶어지는 것과 반대다. 5m가 넘는 전장과 1.9m에 달하는 전폭이 보여주듯 도로 위를 서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럼에도 원한다면 언제든 땅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
부분 변경이 되면서 파워트레인 라인업은 간소해졌다. 유로6 대응을 위해 디젤 모델은 올 연말까지 잠시 숨을 고르고, 3.6L V6 펜타스타 엔진이 주력으로 나섰다. 최고출력은 286마력, 최대토크는 36.0kg.m으로 전형적인 자연흡기 6기통 엔진의 성능을 갖췄다. 여기에 ZF제 8속 토크플라이트 자동변속기가 맞물린다. 개인적으로는 아메리칸 머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V8 헤미 엔진이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헤미 엔진의 수입 계획은 없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펜타스타 엔진은 이미 성능과 내구성을 모두 검증받은 엔진이다. 일상 주행에서 조용하지만 묵직한 사운드도 마음에 든다. V8 못지 않은 사운드다. 다만 럭셔리 세단 치고는 고회전 영역에서 엔진 소리가 지나치게 요란한 게 흠이다. 엔진 측 흡음재를 보강한다면 더 좋겠다.
최대토크는 4,800rpm에서 발휘되지만, 저회전 영역부터 가볍게 차체를 밀어준다. 2톤에 육박하는 공차중량이 무색할 정도다. 액셀러레이터 페달은 가볍지만 민감하지 않아 조작하기 수월하다. 좀 더 페달을 깊게 밟으면 우렁찬 소리와 함께 거구가 내달린다. 순간적인 가속에도 4륜구동 시스템은 고르게 토크를 배분하기 때문에 불안정함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변속기는 원하는 대로 변속이 이뤄지지만, 변속 반응은 업시프팅이든 다운시프팅이든 다소 둔한 편이다. 그래도 변속 충격이 적기 때문에 납득할 만하다. 심한 변속 충격이 인상적(?)이었던 동생 200과는 대조적이다.
이 세그먼트의 차량에 운동 성능을 논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지만, 300C는 예전처럼 무르고 헐렁하지 않다. 서스펜션은 꽤 탄탄해서 코너에서도 롤링이 적은 편이다. 후륜구동 모델에는 20인치 타이어가 적용되는 반면 AWD 모델에는 편평비가 높은 19인치 타이어가 적용되기 때문에 타이어의 탄탄함이 아쉬웠다. 하지만 300C의 포지셔닝을 생각하면 납득할 만한 세팅이다.
지극히 미국적인 색채가 강하면서도 유럽차 못지 않은 승차감을 갖춘 것은 LX 플랫폼의 공이 크다. LX 플랫폼은 풀사이즈 세단과 쿠페를 위한 후륜구동 플랫폼으로, 메르세데스-벤츠 S 클래스(W220)의 전륜 서스펜션과 E 클래스(W2111)의 후륜 서스펜션 구조를 유용한다. 여기에 리어 디퍼렌셜과 ESP 시스템도 메르세데스-벤츠 것을 활용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메르세데스-벤츠의 주행 감각을 간접체험하는 셈이다.
주행 중 시트 포지션은 적당히 낮아 높은 숄더라인에도 불구하고 시야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다. 특히 스티어링 휠의 전동 텔레스코픽/틸팅 기능은 물론, 브레이크 페달과 액셀러레이터의 높이까지 조절하는 기능이 포함돼 있어 체격에 상관 없이 좋은 포지션을 맞출 수 있다. 좀처럼 배려심이 부족해 보였던 미국차에서 만난 배려이기에 더 눈길이 간다. 그 밖에도 200에 앞서 적용된 차선유지 기능(LKA)과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등 주행 편의사양이 추가됐다.
공인연비는 후륜구동이 복합 9.2km/L, AWD가 복합 8.7km/L이다. 좋은 연비는 아니지만 동급 세그먼트 평균에는 충분히 도달한다. 또 시승 간 실연비는 공인연비를 상회했기 때문에 연비에 대한 불만은 없다. 실연비는 시내에서 7.5km/L, 고속도로에서 13km/L을 기록했고, 복합 9.5km/L에 달했다.
크라이슬러 300C는 확실히 매력적인 모델이다. 동 가격대의 수입 모델 대비 넓은 공간과 고급스러운 외관은 300C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다. 현 시점에서는 디젤 라인업의 판매가 중단된 것이 아쉽지만, 가솔린 엔진의 정숙성과 안락함을 즐길 수 있는 3.6 펜타스타 엔진도 충분히 훌륭한 대안이 된다.
원래 미국차는 그렇다. 독일차같은 집요한 장인정신은 부족하다. 많이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한 끗의 완성도가 아쉽다. 하지만 동급 국산차와 견줘도 손색 없는 뛰어난 가격경쟁력과 다양한 편의사양, 기본기가 탄탄한 주행 질감은 국산차, 독일차 외의 제 3의 길을 찾는 소비자에게 색다른 대안을 제공한다.
그간 자동차 업계에서는 미국차의 수난이 이어져 왔다. 럭셔리 카 시장은 독일차에게, 대중차 시장은 일본차에게 빼앗긴데다 경제 위기까지 겹치면서 미국차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300C의 괄목할 완성도는 유서 깊은 아메리칸 럭셔리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 유럽차에 대한 반격이 과연 얼마나 성공적일 지, 관심을 갖고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