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유럽 브랜드들이 럭셔리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미국차=고급차’라는 등식이 성립하던 시절이 있었다. 연비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대배기량 V8 엔진과 광활한 실내공간, 권위적인 디자인으로 대변되던 미국 럭셔리 카들은 2000년대의 경제 위기를 지나며 그 위세가 예전만 못 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브랜드들이 위기를 넘기고 재기하면서, 럭셔리 카 부문에의 도전도 다시 시작되고 있다. 흔히 미국 고급차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포드 산하의 링컨과 GM 산하의 캐딜락이 그들이다. 아직 한국에서도 중장년층에게 링컨과 캐딜락은 최고급 세단이라는 인식이 뚜렷하다.
그런데 두 브랜드의 럭셔리 정책은 다소 상이하다. 링컨은 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과거의 미국차처럼 넓고 안락한 차를 만드는 데에 주력하는 반면, 캐딜락은 후륜구동 주력 라인업을 구성해 유럽-특히 독일차들과 정면 승부를 벌인다는 계획이다. 애매한 크기였던 CTS를 E 세그먼트만큼 키우고, S 클래스·7시리즈·A8과 경쟁할 플래그십 세단 CT6를 선보이는 것도 이러한 맞대결 구도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이번에 시승한 ATS 쿠페는 유럽산 D 세그먼트 컴팩트 쿠페에 맞대응하는 모델이다. ATS 세단이 BMW 3시리즈를 의식했듯, ATS 쿠페는 BMW 4시리즈나 아우디 A5 등과 겨룬다. 뛰어난 성능의 2.0 터보 엔진과 미국차 특유의 풍요로움을 두루 갖춘 ATS 쿠페의 경쟁력을 직접 시승하며 확인해 봤다.
캐딜락의 패밀리 룩은 ‘아트 앤 사이언스’라는 문구로 정리된다. 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직선의 엣지를 살린 디자인은 첨단 과학을 연상시킨다. 2002년 1세대 CTS의 등장 이래로 세로배치된 램프와 날카로운 직선으로 다듬어진 캐딜락의 디자인은 오랜 패밀리 룩으로 자리잡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컨셉트카같은 위용을 뽐내던 옛날의 CTS처럼, ATS 쿠페 역시 양산모델이지만 컨셉트카 못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한다.
전장*전폭*전고는 4,665*1,840*1,400(mm)이며 휠베이스는 2,775mm다. ATS 세단과 비교하면 20mm 길고, 35mm나 넓으며, 25mm 낮다. 휠베이스는 같지만 트레드(윤거)는 20mm 넓어졌다. 다분히 스포티한 비례의 변화인 것이다. 무게중심이 낮아지고 폭이 넓어진 만큼 코너링의 안정성이 좋아지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 상의 변화가 무색하게도 시각적으로는 도어가 2개라는 점 외에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디테일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전·후면 디자인에 세단과 좀 더 차별화를 이뤘어도 좋았겠다. 가령 BMW 4시리즈는 3시리즈의 쿠페지만 라이트 디자인과 디테일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인상을 만든다. 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의 디자인 등 작은 터치로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놓친 것만 같다.
그래도 원래 ATS의 디자인이 멋스러운 만큼 스타일링에 큰 아쉬움은 없다. 세로로 서 있는 라이트의 캐릭터 라인은 차를 더 길어보이게 만들어주고, 새 엠블렘이 박힌 라디에이터 그릴은 당돌한 인상을 준다. 여타 독일제 D 세그먼트 경쟁자들과 완전히 궤를 달리 하는 디자인은 ATS 쿠페의 가장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가 된다.
인테리어는 세단과 대동소이하다. 센터페시아는 캐딜락 전 모델이 공유하는 ‘V’자 레이아웃을 이어가고 있다. 1열 시트 좌우에 뒷좌석 탑승을 위한 시트 젖힘 스위치가 있는 점 외에는 특별한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센터페시아는 여타 모델과 같은 터치 방식이다. 터치 감도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조작할 때마다 햅틱 반응이 와 조작 편의성은 좋은 편이다. 또 디스플레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기만 해도 모션을 인식하고 메뉴를 띄워주는 기능은 퍽 영리하다.
센터페시아 하단을 터치하면 뒷편의 숨은 공간이 나오는데, 단순한 수납공간이 아닌 휴대폰 무선 충전기가 탑재돼 있다. 빠르게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무선 충전 기능은 편리하지만, 전동식이라 빠르게 여닫을 수 없는 센터페시아 뒷편에 위치했다는 점은 급한 휴대폰 사용이 필요할 경우 매우 거슬린다. 차라리 다른 회사들 처럼 센터 콘솔 박스 내에 탑재했다면 어땠을까?
디자인과 마감 품질의 만족도는 독일 경쟁자들보다 높은 편이다. 블랙 하이글로시와 크롬으로 꾸며진 실내는 화려하다. 다만 동시에 조작할 때마다 손 자국이 적잖이 남는 등 관리가 꽤 까다로울 것 같다. 보다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반광 재질을 사용해도 좋겠다.
ATS 세단에서도 동급 대비 비좁은 공간은 지적사항이었는데, 쿠페가 더 나아졌을 리 없다. 쿠페는 4인승으로, 뒷좌석은 앉을 수는 있으나 굳이 사람을 태우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특히 낮아진 전고로 인해 헤드룸이 많이 부족하다. 트렁크 역시 294.5L에 불과해 경쟁모델(4시리즈: 445L, A5: 455L)에 비해 협소하다. 그래도 애초부터 여럿이 타기 위한 차가 아닌, 퍼스널 쿠페의 성격이 강한 만큼 불만은 없다.
그 밖에 ATS 쿠페에는 드라이버 어웨어니스 패키지가 적용돼 오토 하이빔과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 안전 경고 햅틱 시트, 전방 추돌 경보, 후방 교행 경보, 사각지대 경보 장치 등이 탑재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ATS 쿠페는 다분히 미국적인 색채가 강하다. 아메리칸 럭셔리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 하며, 풍요로움이 넘치는 인테리어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미국차다. 하지만 달리기 실력 만큼은 이 차의 국적을 잊게 만들 정도로 탄탄하고 경쾌하다.
국내에 선보인 ATS 쿠페의 심장은 2.0L 직렬4기통 트윈스크롤 터보 엔진이다. 최고출력은 272마력, 최대토크는 40.7kg.m으로 동급에서는 꽤 인상적인 퍼포먼스다. 특히 터보차저에 힘입어 3.5L급 V6 엔진에 필적하는 최대토크를 3,000~4,600rpm의 중속 영역에서 뿜어내기 때문에 신나는 가속이 가능하다.
같은 엔진이 CTS에도 탑재되고, 출력도 더 높지만, 훨씬 작고 스포티한 차체를 지닌 ATS 쿠페가 더 재미있다. 4기통의 한계 상 엔진 사운드가 썩 근사하지는 않지만, 보스 오디오 시스템에 내장된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듣기 싫은 소음을 걸러준다.
제원 상 0-60mph(0-96km/h) 가속은 5.6초 만에 마무리된다. 하지만 트윈스크롤 방식을 채택한 만큼 가속은 폭발적인 터보 엔진보다는 매끄러운 자연흡기에 가깝다. 칼 같은 변속보다 미국식 여유와 부드러움을 강조한 6속 하이드라-매틱 자동변속기가 채택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변속기는 듀얼클러치만큼 빠르지는 않아도 필요할 때 언제든 적극적인 변속을 해 낸다.
ATS 쿠페에는 캐딜락이 자랑하는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MRC) 서스펜션이 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체가 형편없지는 않다. 제법 단단한 하체는 코너링에서도 거의 롤링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독일 경쟁자들의 엔트리 모델보다 훨씬 스포티하다. ‘독일차보다 더 독일차같다’는 세간의 평가가 와 닿는다.
오버스티어보다는 약한 언더스티어 성향을 띠며 코너를 탈출한다. 핸들링에도 거의 유격이 없어 운전이 퍽 재미있다. 이런 아찔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실내는 한 없이 차분하고 모든 동작에 여유가 있다. 운전자를 쉴 틈 없이 몰아 붙이는 독일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이고, 그것이 바로 캐딜락의 매력이다.
공인 연비는 복합 9.9km/L로, 동급 엔진들에 비하자면 조금 안 좋은 수준이다. 그런데 실연비가 기대에 못 미쳤다. 항속 연비는 13km/L 정도로 나쁘지 않았지만 시내 연비는 7km/L에 못 미쳤다. 트립 컴퓨터의 평균 연비에 비해 체감 연비가 눈에 띄게 안 좋았다. 유독 캐딜락 차들은 연비가 좋지 않다. 이것도 미국식 여유의 일환으로 봐야 할까?
캐딜락 ATS 쿠페는 분명 미국차다. 하지만 독일차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운전 재미와 달리기 실력을 두루 갖췄다. 게다가 도로 위 어디서나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려한 디자인은, 오히려 길에서 너무 흔해진 독일 경쟁자들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ATS 쿠페를 선택하면서 희생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비좁은 실내 공간과 적재 용량,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연비 등이 그렇다. 하지만 작은 희생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 멋진 아메리칸 럭셔리 쿠페에는 동급 중 가장 강력한 엔진과 풍요로운 편의사양이 모두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라이벌들보다 1,000만 원 이상 저렴하다.
연인과 함께 하는 낭만적인 드라이브를 즐기다가도 혼자 탔을 때는 짜릿한 주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캐딜락 ATS 쿠페는 가장 잘 어울린다. 긴장감과 여유의 절묘한 경계를 달리는 것은 캐딜락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대담한 아메리칸 럭셔리는 가장 작은 컴팩트 쿠페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