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현지 시각) 카 앤 드라이버 등 외신은 뉘르부르크링 서킷 운영 당국이 ‘녹색 지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뉘르부르크링 북쪽 코스에서의 랩타임 계측을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정확히는 랩타임 계측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높은 속도를 내는 몇몇 구간에 속도 제한이 생겨 사실 상 랩타임 기록이 불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이 소식을 알려온 것은 하이퍼카의 개발과 퍼포먼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에이펙스(APEX: The Story of the Hypercar)”의 제작진이다. 이들은 포르쉐 918, 페라리 라페라리, 맥라렌 P1 등 세계 최정상급 하이퍼카들의 제작 및 개발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고 있는데, 스웨덴의 슈퍼카 메이커 쾨닉세그와 함께 취재 도중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
쾨닉세그는 1,360kg의 중량에 1,360마력을 내는 출력당 무게비 1의 하이퍼카, 원(One: 1)으로 뉘르부르크링 북쪽 코스 랩타임 계측에 도전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촬영 팀과 헬리콥터까지 준비하고 북쪽 코스를 찾았지만, 뉘르부르크링의 운영을 맡고 있는 “카프리콘 뉘르부르크링” 측은 속도 제한을 해제해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유럽 모터스포츠의 성지와도 같은 뉘르부르크링에 속도 제한이 생긴 것은 지난 3월 28일 발생한 사고 때문이다. 닛산의 GT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통해 레이스에 입문한 얀 마덴버러의 GT-R이 북쪽 코스에서 개최된 VLN 내구 시리즈 경기 도중 Flugplatz 코너에서 날아올라 방호벽을 넘어간 사고로 관람객 1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
이 끔찍한 참사 이후 독일 모터스포츠 연맹(DSMB)는 회의를 통해 북쪽 코스 일부 구간에 속도 제한을 발효했다. 현재 속도 제한이 있는 구간은 총 4곳으로, 사고가 난 Flugplatz 및 Antoniusbuche, Schwedenkreuz 등 3곳에서는 200km/h 제한, 최고속을 내는 4km 길이의 Döttinger Höhe에서는 250km/h 제한이 이뤄지고 있다. 이 제한은 일단 올해 말까지 적용되지만 연장될 수 있다. 뉘르부르크링 측에 따르면 이 속도 제한은 서킷 전체를 임대하거나 모터스포츠 행사를 치를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쾨닉세그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바로 얼마 전 람보르기니가 북쪽 코스에서 아벤타도르 SV를 몰고 6분 59초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 운영 당국은 “새 속도 제한 규정이 발효되기 하루 전 람보르기니가 랩타임을 계측했다”고 해명했지만, 그 뒤에도 북쪽 코스에서 WTCC 경기가 속도 제한 없이 치뤄지는 등 규정 발효 시기가 불명확하다는 것.
쾨닉세그 원은 최고속 구간에서 300km/h 이상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속도 규정 하에서는 제대로 된 랩타임을 기록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포르쉐 918의 기록을 넘어 최고 6분 30초대 기록까지 내다봤던 쾨닉세그는 허탈한 기색이 역력하다고 에이펙스 제작진들은 전했다. 이들은 스파 프랑코샴 등 다른 랩타임 측정 서킷을 찾을 계획이지만 다른 서킷의 기록이 뉘르부르크링만한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한편,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들이 경연을 펼치는 총연장 21km의 뉘르부르크링 북쪽 코스는 1927년 개장 이래 극악의 난이도로 ‘녹색 지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난코스인 만큼 이 곳에서의 빠른 랩타임은 그 차의 주행 성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돼 왔으며, 신차 개발의 장으로도 널리 활용돼 BMW, 닛산, 포르쉐, 현대 등이 뉘르부르크링에서 주행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양산차 랩타임 1, 2위는 키트 카인 래디컬이 차지하고 있지만, 클로즈드 콕핏 형태의 완성차로써는 포르쉐 918 스파이더(6분 57초 00)와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V(6분 59초 73)만이 7분 이하의 기록을 지니고 있다. 닛산 GT-R 니스모(7분 8초 68), 굼페르트 아폴로 스피드(7분 11초 57), 닷지 바이퍼 ACR(7분 12초 13)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이번에 랩타임 경신에 나설 예정이었던 쾨닉세그 원은 1,360kg에 1,360마력이라는 엄청난 제원을 바탕으로 최고속도 453km/h, 0-100km/h 가속 2.8초 이하, 0-400km/h 가속 20초, 400-0km/h 제동 10초 라는 괴물같은 성능을 뽐낸다. 쾨닉세그 원의 가격은 한화 약 20억 원 내외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