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유럽형’이라는 말은 이제 대세로 자리잡았다. 일본과 북미의 완성차 업체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시련을 겪는 동안 유럽, 특히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은 승승장구하며 세계 자동차 시장의 표준이 됐다. 이제는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보다 더 유럽형인, 더 독일차같은 차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GM의 럭셔리 브랜드인 캐딜락 역시 예외가 아닌데, 최근 라인업을 적극적으로 개편하면서 노골적으로 독일 브랜드들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D 세그먼트와 E 세그먼트의 중간에 위치했던 CTS는 이제 5시리즈, E 클래스 등과 경쟁하는 E 세그먼트로 몸집을 불렸고, 새로 자리잡은 ATS가 후륜구동 엔트리 세단으로 포지셔닝됐다. 풀사이즈 세단 CT6의 등장이나 고성능 디비전 ‘V’ 라인업 추가도 다분히 독일 경쟁자들을 의식한 것이다.
혹자는 캐딜락의 최신 모델들이 독일차보다 더 독일차같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 만큼 캐딜락이 미국적 색채를 지워가고 있다는 것. 그러나 럭셔리 크로스오버를 지향하는 캐딜락 SRX는 여전히 미국적인 풍요로움을 오롯이 담고 있다.
2세대 SRX는 올해로 출시 6년 차를 맞이했지만, 인테리어가 최신 패밀리 룩에 맞게 변경되고 편의 장비가 추가되는 등 상품성 개선이 이뤄졌다. 또 세계 시장에서 크로스오버 SUV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만큼, 아메리칸 럭셔리 크로스오버의 선구자 격인 SRX를 재조명할 가치는 충분하다. SRX가 과연 독일 SUV의 아성에 맞설 수 있을 지, 시승을 통해 확인했다.
SRX를 실제로 보면, 상당히 묵직한 양감에 압도된다. 면 하나 하나가 또렷하고, 캐딜락 특유의 미래지향적인 엣지가 강렬해 유선형 자동차 일색인 도로 위에서 강한 존재감을 내비친다. 1세대 CTS가 처음으로 혁신적인 패밀리 룩을 선보인 이래로 캐딜락 모델들은 일관되게 미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전 세대 CTS를 연상시키는 앞모습이 워낙 강렬하고, 앞으로 쏟아져 내리듯 기울어진 특이한 전면부 라인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장이 짧은 가분수처럼 보이지만, 뒤에서 바라보면 표준적인 SUV의 비례를 지니고 있다. 비례가 어색하고 구형 분위기를 풍기는 전면부 디자인만 수정해도 훨씬 디자인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디자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점은 불만이다.
전장*전폭*전고는 4,850*1,910*1,665(mm), 휠베이스는 2,807mm이다. SRX는 쉐보레 캡티바와 에퀴녹스 등이 채택한 쎄타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쎄타 프리미엄’ 플랫폼을 사용한다. 쉐보레 말리부, 오펠 인시그니아 등 승용 모델을 위한 신형 입실론 2 플랫폼을 일부 유용해 승차감을 개선했다는 것이 GM의 설명이다. 캐딜락 SRX와 사브 9-4X만이 이 플랫폼을 사용한다.
그 밖에 프론트 휀더에 위치한 크롬 벤트가 돋보인다. 에어 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쪽에는 방향 지시등 역할을 하는 LED 바가 장착돼 있다.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스타일링이 소소한 디테일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비록 외관은 그대로지만, SRX의 실내는 한 차례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신형 CTS와 ATS 등에 적용된 새로운 센터페시아 디자인이 탑재되고 있다. 대부분의 조작 버튼을 터치화 했지만 조작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햅틱 반응을 추가한 점이 마음에 든다. 직관적인 ‘큐(CUE)’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터치 반응이나 블루투스 연결 속도도 훌륭하다. 심플하면서도 캐딜락의 색채가 뚜렷하고 미래 지향적인 센터페시아는 실용도나 디자인 모두 좋은 점수를 줄 만하다.
최근 많은 크로스오버가 승용차만큼 낮은 시트포지션을 채택하지만, SRX는 전형적인 SUV와 같이 높은 시트포지션을 고집하고 있다. 거의 상용차에 가까울 정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시야가 넓어 운전하기는 편하다. 시트와 도어 트림, 대쉬보드 등 인테리어의 마감 품질은 좋은 편인데, 재질감이 유럽 차와는 다른, 푹신하고 부드러운 미국식 럭셔리함이 느껴진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동급에서 보기 드문 뒷좌석 모니터가 장착돼 있다는 점이다. 2열에는 좌우 각 1개의 8인치 플립 모니터가 탑재된다. 터치는 지원하지 않지만 리모컨과 무선 헤드폰이 제공돼 좌우 각각 다른 미디어 재생이 가능하다. 동급 SUV들이 운전자 위주인 반면 뒷좌석 엔터테인먼트에 신경쓴 점이 이색적이다.
오디오는 보스 센터포인트 서라운드 시스템이 탑재되는데, 음질이 퍽 뛰어나다. 오디오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음악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이 오디오 시스템은 엔진 소음을 상쇄시키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 기능을 포함한다.
2015년형 SRX에는 기타 안전을 보장하는 전자 장비가 대폭 추가됐다. 사각지대경보, 후방 교행차량 경보, 전방 추돌 경고, 차선 이탈 경고, 안전 경고 햅틱시트, 후방 카메라, 인텔리빔 헤드램프(상향등 어시스트) 등으로 구성된 ‘드라이버 어웨어니스 패키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자동 충돌 대비 시스템으로 이뤄진 ‘드라이버 어시스트 패키지’가 적용됐다. 안전에 관한 한 경쟁모델 대비 부족함은 없다.
캐딜락 SRX의 개성 강한 디자인과 경쟁력 있는 편의사양에도 불구하고, 노후화된 파워트레인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현재 국내에는 3.0L V6 직분사 자연흡기 한 종류의 엔진만 투입되고 있다. LF1이라는 코드명의 이 엔진은 한국GM 알페온에 탑재됐던 바 있다. 267마력의 최고출력을 6,950rpm의 고회전에서 뿜어내며 30.8kg.m의 최대토크는 3,200rpm에서 발휘된다. 여기에 하이드라-매틱 6속 자동변속기와 상시 4륜구동 시스템이 맞물린다.
엔진 자체의 회전 질감은 나쁘지 않다. 회전수를 올리면 카랑카랑한 사운드가 영락없는 GM 엔진이다. 전형적인 미국 SUV답게 기어비가 굉장히 길고 중량이 2,100kg에 이르기 때문에 출력 대비 가속감은 매우 둔하다.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힘이 부족하지는 않아 꾸준히 고속 영역까지 가속이 가능하다. 변속기 자체는 직결감이나 회전수 보상 기능 등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다.
서스펜션은 제법 탄탄한 편이지만 댐핑 스트로크가 길다. 때문에 미국차 특유의 여유로움 속에서도 울렁거리지 않고 자세를 잡아 나간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높은 까닭에 코너에서의 롤링과 가·감속 시 피칭 현상이 도드라졌다. 전반적인 구동계의 감각이나 하체의 움직임이 여타 경쟁자와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문제는 효율이다. 공인 연비가 복합 7.6km/L인데 시승 간 시내 연비는 가까스로 5km/L을 기록했고, 고속 연비는 10km/L에 그쳤다. 2톤이 넘는 차체에 3L급 자연흡기 엔진을 얹어놓은데다, 초반 가속이 경쾌하지 못해 특히나 시내 연비가 형편없었다. 그나마 연료탱크가 80L나 되기 때문에 연료계가 떨어지는 속도가 더딘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가솔린 크로스오버가 나름의 확고한 가치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유지가 부담스러운 효율이라면 비교우위를 지니기 어렵다. 디젤이나 하이브리드, 하다 못해 가솔린 다운사이징 엔진이라도 도입될 필요가 있다. ATS와 CTS에 도입된 2.0 터보 엔진은 차기 SRX의 효율과 성능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독일제 디젤 SUV에 질려버린 소비자라면 캐딜락 SRX는 탁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세그먼트에서 매끄러운 6기통 자연흡기 엔진의 감성을 만끽할 수 있는 모델 또한 SRX가 유일하다. 게다가 호화로운 안전장비와 편의사양, 2열 디스플레이 등은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윗급 모델에서도 보기 힘든 옵션들이다. 말 그대로 아메리칸 럭셔리의 풍요로움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개성을 넘어서 글로벌 트렌드와 견줘 봤을 때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부담스러운 저효율 엔진, 경량화가 시급한 2.1톤의 차체, 패밀리 룩에 뒤쳐진 어색한 비례의 익스테리어 등이 그렇다. 조금만 손 보면 SRX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해 줄 요소들이다.
캐딜락 SRX는 유럽 출신의 경쟁자들과는 다른 아메리칸 럭셔리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는 캐딜락에게 크로스오버 SRX는 장차 브랜드를 견인할 젊고 역동적인 볼륨모델이 될 것이다. SRX의 현재만큼이나 미래의 후속 모델이 기대되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