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그십(flagship)’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 쓰면 ‘기함(旗艦)’이 되는데, 해군 함대에서 지휘관이 타는 배를 의미한다. 지휘관이 타고 있는 군함에는 지휘관의 깃발을 세우는 것에서 유래한 단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브랜드 내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모델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역사 속에서 기함은 지휘관이 타는 만큼 가장 심혈을 기울여 설계됐고, 자연스레 강력한 무기와 방어력을 앞세워 함대의 맨 앞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배였다. 자동차 회사의 플래그십 역시 회사의 모든 기술력이 총동원된 최첨단 장비와 고급스러운 마감, 강력한 성능을 갖추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이끄는 역할을 하니, 누가 처음으로 자동차에 이 용어를 사용했는 지는 몰라도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하겠다.
한국 시장에 4년 만에 컴백한 뉴 레전드는 기술력으로 대변되는 브랜드, 혼다의 플래그십 세단이다. 반가운 귀환이지만 축배를 들 여유는 없다. 당장 불꽃 튀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수입 프리미엄 전장에 뛰어들어 녹록치 않은 싸움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레전드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뉴 레전드가 5세대 모델인데, 2세대가 한국GM의 전신인 대우자동차에서 ‘아카디아’로 선보인 적 있다. 세련된 스타일과 기술적 완성도, 무게배분을 고려한 세로배치 엔진 등 여러 차별화된 매력으로 아직까지도 시대의 명차로 회자되고는 한다. 두 세대를 건너뛰어 4세대가 한국에 혼다 마크를 달고 처음 선보였고, 이제 그 후계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기술의 혼다’의 명성에 걸맞게 새로 돌아온 레전드는 겉과 속 모두가 확실하게 바뀐 모습이다. 그 이름처럼 전설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모양새다. 과연 혼다가 레전드와 함께 한국 시장에서의 재흥을 꿈꿀 수 있을 지 시승을 통해 확인해 봤다.
“와, 차 정말 크네.” 처음 차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그렇다, 정말 크다. 사진으로는 그 풍채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사이즈도 사이즈지만, 가로로 길게 늘어선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 테일램프와 바디의 풍만한 볼륨감은 차를 더 커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전장*전폭*전고는 5,000*1,890*1,480(mm)로 현대 제네시스보다 전장이 10mm 길고 전폭과 전고는 같다. 앞바퀴굴림 대형차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서 이 만한 크기의 전륜구동 세단은 흔치 않다.
깔끔하면서 뭔가 미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면부에서는 ‘쥬얼 아이(Jewel Eye)’라고 이름지어진 헤드라이트가 독특하다. 좌우 각각 10개의 큐빅을 닮은 LED 광원을 탑재했는데, 상향등을 제외한 8개의 렌즈가 서로 다른 범위를 비춰 매우 넓은 배광이 가능하다. 다만 곤충의 겹눈처럼 보이는 독특한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또 안개등 위치의 LED 주간주행등이 바로 위 방향지시등이 작동할 때도 꺼지지 않아 전면부 방향지시등의 시인성이 떨어지는 점도 옥에 티다.
뒷모습은 일견 BMW 7시리즈를 연상시키는데, LED 테일램프의 시인성이나 디자인 모두 합격점이다. 다만 레전드의 전반적인 디자인이 상당히 풍만한 볼륨감과 입체감을 강조하는 데 반해, 리어 범퍼는 다소 납작하고 평면적인 형태인 점이 아쉽다. 범퍼 디자인이 개선되면 앞뒤 디자인의 일체감과 전반적인 완성도의 향상도 기대해볼 수 있겠다.
레전드는 혼다의 기함이지만, 북미를 겨냥한 프리미엄 브랜드 어큐라(Acura)의 기함이기도 하다. 일본 브랜드 중 최초로 북미에 런칭한 프리미엄 브랜드가 혼다의 어큐라다. 아시아 시장에서는 한국이 첫 출시 지역일 정도로 레전드는 북미 판매(북미명 어큐라 RLX)에 집중하는 모델이고, 그래서인지 개발단계부터 어큐라 브랜드를 의식한 티가 역력하다.
그것은 디자인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레이더와 전방 센서류가 내장된 두툼한 라디에이터 그릴이나 LED 헤드라이트의 디자인은 혼다보다는 어큐라의 패밀리 룩과 더 흡사하다. 전반적인 디자인 완성도는 높지만, 혼다 브랜드와의 일체감이 떨어지는 디자인이 브랜드 이미지 견인에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기자만의 걱정일까?
실내는 전형적인 럭셔리 세단의 형태이면서 고급스러운 소재감이 돋보인다. 특별히 디자인적으로 돋보이는 부분은 없지만 가죽과 우드 트림의 질감, 버튼의 조작감 등이 우수하다. 특히 요즘 일본 브랜드들이 많이 선보이는 듀얼 모니터를 채택한 점이 특이하다. 상단 8인치 모니터는 내비게이션을, 하단 7인치 터치 패널은 시스템 조작을 담당한다.
눈에 띄는 점이라면 터치 패널에서 조작을 통해 잠금이 가능한 전동식 글러브 박스와 좌우로 모두 열리는 독특한 센터 콘솔 박스 등이다. 앞좌석 편의성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눈에 띈다. 또 좌측 컴비네이션 스위치 끝단의 버튼을 누르면 사이드 뷰와 서라운드 뷰까지 지원하는 카메라 시스템이 작동한다. 가격 대비 알찬 구성은 레전드의 강력한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다.
이전 세대 대비 휠베이스가 50mm 늘어나면서 2열 공간이 많이 넓어졌는데, 전륜구동의 특장점까지 살려 동급 중 가장 넓은 수준의 레그룸을 자랑한다. 뒷좌석은 제법 안락하지만 선셰이드와 열선 시트 외엔 별다른 편의장비가 보이지 않는데, 앞좌석의 풍부한 편의사양과 대조적이다. 레전드가 고리타분한 쇼퍼 드리븐이 아닌, 오너 드리븐 성향이 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레전드에는 14-스피커 크렐 오디오 시스템이 탑재됐다.. 지난 서울모터쇼에서 오케스트라와 음질 대결을 할 정도로 혼다가 자랑하는 품목 중 하나다. 곳곳에 눈에 띄는 스피커가 마치 고급 오디오를 과시하는 것 같다. 이전까지만 해도 혼다는 오디오와 같은 감성품질에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기특하다.
그 밖에 자동 정차까지 가능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LKAS), 선행 차량과의 충돌 위험성이 있을 때 작동하는 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CMBS), 사각지대 경보 시스템(BSI), 후방 교행 경보 시스템(CTM) 등 동급을 선도하는 전자 장비로 무장했으며, 1열 안전벨트 전자식 프리텐셔너와 7개의 에어백 등 풍부한 안전장비도 갖췄다. 과연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 하겠다.
레전드를 단순한 고급 세단으로 치부하는 것은 이 차의 가치를 절반만 보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혼다는 긴 모터스포츠 역사를 자랑하는 역동적인 브랜드다. 최근에는 대중차에 더 집중했지만, 왕년에 NSX, S2000 등 쟁쟁한 스포츠카들을 만들어 낸 경험이 있기에 대형 세단조차 허투루 만드는 일이 없다.
파워트레인은 3.5L i-VTEC V6 직분사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의 조합이다. 엔진에는 혼다의 고효율 가변 실린더 기술인 ‘어스 드림 테크놀러지’가 적용됐는데, 요즘 보기 드문 SOHC 방식인게 특이하다. 최고출력 314마력, 최대토크 37.6kg.m으로 최대토크는 비교적 낮은 4,500rpm에서 발휘된다.
가변 실린더 기술(VCM)은 가용 실린더를 상황에 따라 3, 6기통으로 전환하여 연료소모량을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이와 더불어 혼다의 유명한 가변 밸브 기술인 VTEC 적용으로 동급 배기량 대비 높은 출력을 달성했다. 전륜구동 파워트레인에서 이 정도의 고성능을 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안정적인 트랙션을 유지해주는 전자 제어 시스템이 있어서 가능한 레이아웃이다.
엔진의 회전질감은 상당히 매끄럽다. 6기통이 아니라 8기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특히 진동이 동급에서 눈에 띌 정도로 억제된 점이 마음에 든다. 흡음 및 차음재가 대폭 강화됐으며, 유리의 두께도 이전 세대보다 두꺼워졌다. 또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ANC)’과 ‘액티브 사운드 컨트롤(ASC)’이 적용됐는데, 각각 노면 소음과 엔진 소음을 상쇄시키는 주파수를 발생시켜 소음을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또 이번 레전드에서는 지난 세대의 SH-AWD 4륜구동 시스템이 빠진 대신, P-AWS(Precision-All Wheel Steer)라는 명칭의 세계 최초 4륜 정밀 조향 기술이 도입됐다. 이게 아주 물건이다. 후륜의 토(Toe) 각도를 상황에 따라 2도 가량 조절해 주는데, 가령 저속에서 코너를 돌 때는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고속에서 코너를 돌 때는 앞바퀴와 같은 방향으로 조향한다. 제동 시에는 두 바퀴가 모두 토-인(Toe-In, 안쪽으로 정렬)되면서 제동 안정성을 강화한다.
P-AWS 덕분인지 몰라도, 5m급 차체가 무색할 정도로 레전드의 코너링은 예리하다. 스티어링 휠의 유격은 적당히 있지만, 이와 별개로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정확히 돌아나가고 언더스티어가 도통 느껴지지 않는다. 강력하고 부드러운 엔진과 결합되니 후륜구동 저리가라 할 만큼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감히 평가하자면 전륜구동 세단 중 이 만한 움직임을 보이는 차는 거의 없다. 이렇게 큰 차라면 더욱 그렇다.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면 움직임은 더욱 극적이다. 묵직한 핸들링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중형 세단보다 날카롭게 코너를 빠져나간다. 레드 존까지 시종일관 부드러운 엔진은 V8을 연상시키고, 패들 시프트를 당겨 변속할 때마다 스포츠카처럼 우렁찬 회전수 보상이 이뤄진다. 모터스포츠 판을 주름잡던 혼다의 저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연비가 조금 아쉽긴 했다. 공인연비는 9.7km/L인데 시승 간 시내연비는 6~7km/L을 오갔고, 고속연비는 11km/L 정도를 기록했다. 순항 연비는 14km/L을 넘을 때도 있었지만, 공인연비 대비 부족하기는 하다. 물론 차의 크기나 포지셔닝을 생각하면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다.
레전드는 잘 만든 차다. 일단 가격대비 상품성이 정말 좋다. LED 헤드램프와 풍부한 전자장비 및 편의사양, 매끄러운 엔진의 조합은 오너드리븐 럭셔리 세단의 모범답안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륜구동이기에 가능한 넓은 공간과 후륜구동 못지 않은 P-AWS의 핸들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좁고 눈길에 취약한 후륜구동 세단보다 매력적이다. 혼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레전드는 그 자체로서 ‘기술의 혼다’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이 세그먼트의 프리미엄 세단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선결돼야 한다. 우수한 상품성은 기본이요, 브랜드가 주는 프리미엄과 그 차만의 헤리티지가 필요하다. 여기에 차별화된 기술 요소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실질적인 성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얻기 힘들다.
레전드의 상품성이 뛰어나고 실질적인 성능 역시 매력적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같은 가격이면 살 수 있는 프리미엄 모델이 너무나도 많다. 특히 세그먼트를 지배하고 있는 독일 3사의 아성을 ‘혼다’라는 브랜드로 뛰어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브랜드 밸류 차이를 극복할 레전드만의 스토리를 만들기에는 헤리티지나 쌓여 온 기술 요소도 부족하다. 가령 아우디 하면 수 십년간 고집해 온 ‘콰트로’가 생각나듯이 말이다. P-AWS는 훌륭한 기술이지만 그 자체로써 레전드의 스토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혼다의 과제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니지만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면 레전드는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차다. 특히 수입 프리미엄 세단 시장의 볼륨이 큰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혼다가 일본 이외에 아시아 최초로 레전드를 한국에 선보인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과연 레전드가 이름처럼 프리미엄 세단의 ‘전설’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