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을 시샘하는 찬 바람이 불었는데, 다른 때보다 빨리 벚꽃이 만개하면서 바야흐로 진짜 봄 분위기가 온 거리에 가득하다. 따뜻해진 날씨에 꽃을 만날 수 있는 거리와 공원은 온통 상춘객 인파로 붐비고 있다.
운전자들에게도 이런 봄 날씨는 축복이다. 겨우내 꽁꽁 틀어막았던 창문과 썬루프를 열고 봄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삭막했던 겨울과 달리 어딜 가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꽃들이 가득하고, 근교 곳곳에서 축제가 치뤄지니 사랑하는 이와 훌쩍 떠날 곳도 많다.
썬루프만으로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하다면, 오픈 에어링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찬 바람에 탑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컨버터블 오너라면 아직 햇볕이 따갑지 않은 요즘 날씨야말로 오픈 에어링에 제 격이다.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햇빛, 흩날리는 꽃잎까지 모두 탁월한 개방감의 컨버터블을 위한 완벽한 조합이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막내 로드스터인 SLK 200은 고상한 메르세데스-벤츠 가문에서 봄날의 낭만적인 오픈 에어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델이다. 1996년 출시 이래 데뷔 20년차를 맞이한 3세대 SLK는 노련한 하드탑 로드스터 제작 노하우와 뛰어난 밸런스, 최적의 안락함이 어우러졌다. 작지만 갖출 것은 빠짐없이 갖춘 SLK 200과 함께 봄날의 오픈 에어링을 즐겨봤다.
여느 메르세데스-벤츠 모델과 마찬가지로, SLK 클래스 역시 작명에서 그 아이덴티티와 지향점을 찾을 수 있다. SLK는 독일어로 ‘sportlich, leicht, kurz’의 약자로, 영어로는 ‘sporty, light, short’의 뜻을 담고 있다. 즉 컴팩트 경량 로드스터를 지향한다는 뜻. SLK 클래스의 첫 등장은 1996년이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설적인 300SL의 동생 격이자 경량 로드스터였던 190SL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SLK 200의 전장*전폭*전고는 4,140*1,835*1,325(mm)에 불과하며, 휠베이스 역시 2,430mm 수준이다. 전장이나 휠베이스로 보자면 국산 경차와 소형차의 중간 정도의 컴팩트한 사이즈다. 경쟁자들과 비교해도 BMW Z4보다 작고, 아우디 TT 로드스터와 비교해도 SLK 200쪽이 좀 더 작다. 공차중량은 1,520kg인데, 강성 확보가 어려운 로드스터의 특성과 하드탑을 고려하면 납득할 만한 중량이다.
전면부는 F1 노즈를 닮은 이전 세대와 달리 190SL을 닮은 싱글 루브르 그릴을 장착해 보다 굵은 라인으로 다듬어졌다. GT 로드스터인 SL 클래스와도 상통하는 디자인이며, 최근 공개된 AMG GT도 비슷한 디자인 큐를 이어간다. 반면 뒷모습은 유선형인 최신 메르세데스-벤츠 트렌드보다는 반 세대 정도 이전의 스타일이다. 조만간 부분 변경되며 이름이 SLC 클래스로 바뀔 예정인데, 부분 변경 모델에서는 최신 패밀리 룩이 반영될 전망이다. 여담이지만 ‘SLR 스털링 모스’를 디자인한 한국인 디자이너 윤일헌씨가 바로 이 3세대 SLK 클래스의 디자이너이다.
긴 도어를 열고 시트에 앉으면, 정통 로드스터답게 시트 포지션이 상당히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낮은 시트 포지션과 계란형의 루프 라인 덕에 헤드 룸이 넉넉하다. 차가 작아 좁지 않을까 걱정되겠지만, 두 사람이 앉기에는 충분히 아늑하다. SLK 클래스에는 선택 사양으로 원터치 방식으로 글래스 루프의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매직 스카이 컨트롤이 탑재되는데, 시승차에는 적용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유선형의 루프는 닫아둬도 매력적이지만, 열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배리오-루프(Vario-Roof)”라는 이름의 전동식 하드탑은 정차 상태에서 20초 만에 완전히 열고 닫을 수 있다. 저속으로 주행 중에 아예 작동하지 않는 점은 옥에 티다. 하드탑을 개방하면 트렁크 내에 차곡 차곡 접혀 보관되는데, 개방 중에도 트렁크 공간의 절반 가량을 사용할 수 있다. 훌쩍 여행을 떠날 때도 두 사람 분의 작은 캐리어나 가방을 싣기에 부족함이 없다.
루프를 열면 불쑥 튀어나온 롤-오버 바가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 뒷면에 접이식으로 장착된 에어가이드가 특이하다. 윈드 디플렉터라고도 불리는 에어가이드는 탑을 연 채로 주행해도 머리가 휘날리지 않도록 공기의 흐름을 제어해주는 역할을 한다. SLK 클래스의 경우 A 필러가낮은 디자인으로 인해 앉은 키가 큰 기자는 윗머리가 바람에 날렸지만, 에어가이드 덕에 와류가 억제돼 캐빈룸 안으로 바람이 들이치지는 않았다.
인테리어 구성은 여지 없는 메르세데스-벤츠다. 자그만한 로드스터라고 해서 결코 허투루 마감하는 법이 없다. 구석구석의 소재는 고급스럽고, 버튼 하나 하나의 조작감도 품격있다. 바람개비 형태의 에어 벤트는 클래식한 운치가 느껴지고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쾌적한 오픈 에어링을 즐길 수 있도록 헤드레스트 아래의 송풍구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와 목을 둘러주는 에어 스카프 기능도 탑재돼 있다.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순간에도 메르세데스-벤츠의 품격을 잃지 말라는 배려다.
시트는 헤드레스트가 일체형인 버킷 타입인데, 갑갑하거나 불편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체구가 큰 기자에게도 착 감기는 착좌감이 일품이다. 코너링에서도 두툼한 볼스터가 자세를 잡아주며 장시간 운전 시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스포티한 정통 로드스터로써의 감각과 그랜드 투어러의 여유가 곳곳에 어우러져 있다. 시트가 눕혀지지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언제나 하늘을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시트를 젖히고 누워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편의성을 추구한다면 2인승 로드스터보다는 4인승 카브리올레를 추천한다.
이제는 바람을 맞으며 달릴 시간이다. SLK 200에는 이름처럼 컴팩트하지만 경쾌한 엔진이 탑재돼 있다. 1.8L 직렬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은 184마력의 최고출력과 27.5kg.m의 최대토크를 선사한다. 요즘 기준에서는 배기량 대비 그리 높은 성능이 아니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늘 그래왔다. 극한의 코너링을 추구하는 BMW나 사계절 노면을 움켜쥐고 달리는 아우디와는 지향점이 완전히 다른 까닭이다. 적당히 여유로운 출력으로 유랑을 즐기는 것이 메르세데스-벤츠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활기찬 SLK에게도 마찬가지다.
7단 자동변속기는 여타 메르세데스-벤츠와 달리 스티어링 칼럼이 아닌 센터 터널에 시프트 노브가 위치해 있다. SLK 클래스의 본질이 스포츠에 있다는 증거다. 전형적인 스텝게이트 타입에 D에서 좌우로 시프트 노브를 밀면 수동 변속이 되는 타입인데, 강제변속을 막는 완전 수동모드가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시프트 노브 조작이 낯설다면 패들 시프트 변속도 가능하다.
가속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초반 가속에는 약간의 터보래그가 발생하는데, 변속기 역시 칼 같은 가속보다는 한 템포 늦게 동력을 전달하면서 초반에는 다소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일단 가속이 시작되면 부족함 없이 밀고 나가는 느낌이 퍽 경쾌하다. 레드 존이 시작되는 6,000rpm이 조금 넘으면 변속이 이뤄지는데, 다운시프트 시에는 5,000rpm까지만 레브 매칭이 이뤄지는 점이 특이하다.
4기통 터보라고 얕잡아 봐선 안된다. 가속 중에는 제법 근사한 배기음이 대기를 울리는데, 변속 시에 백프레셔 사운드가 들리는 것도 메르세데스-벤츠 치고는 인상적이다. SLK 200의 0-100km/h 가속시간은 7.0초, 최고속도는 237km/h에 이른다. 부족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휠베이스가 짧아 직진 안정성 면에서 불리한 구조적 특성을 고려하면 적당히 재미있게 달릴 수 있는 성능이다.
실제로 가속보다는 코너링에서 더 재미있다. 짧은 휠베이스와 넓은 트레드 덕에 와인딩 로드를 돌아나가는 움직임이 민첩하다. 서스펜션도 지나치게 단단하지 않으면서 쫀득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로드스터인데다 시트 포지션도 낮아 낮은 무게중심은 선회 안정성을 더해 주면서도 마치 코너 출구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운동 성능을 보여준다. 되려 SLK 350이나 AMG 모델이라면 너무 높은 출력으로 말미암아 재가속 시 오버스티어를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가벼운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기에 적당한 파워트레인과 바디의 밸런스가 탁월하다.
탑을 열고 100km/h까지 속도를 높여도 실내에서는 동승자와 대화하기에 지장이 없고, 바람에 음악 소리가 묻히는 일도 없다. 창문을 닫으면 양 옆으로도 바람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아 마음껏 달리기에 부담이 없다. 20년차 하드탑 로드스터의 연륜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기에 주차할 때가 아니면 자꾸만 탑을 열고 싶어진다. 비가 오지만 않는다면 탑을 열고 바람을 맞는 것이 로드스터에게 가장 어울리는 드라이브다.
특별히 연비를 신경쓰며 탈 차는 아니지만, 공인 연비는 복합 10.6km/L로 출력 대비 부담 없을 만큼 좋은 편이다. 실연비 역시 연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흘 간의 시승에도 불구하고 10km/L 내외를 기록했고, 80km/h 순항 주행에서는 평균 연비가 15km/L에 이르렀다.
메르세데스-벤츠 SLK 200은 팔방미인이다. 경쾌한 성능, 고급스러운 마감품질, 탁월한 하드탑과 오픈 에어링은 물론 기대 이상의 연비까지 갖췄으니 칭찬을 아낄 수 없다. 더군다나 동급 경쟁자들과 비교해봐도 합리적인 가격과 적은 배기량 덕에 유지나 퍼포먼스 모두 덜 부담스러운 파워트레인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유서 깊은 로드스터 아이덴티티가 살아있는 작지만 품격있는 디자인은 SLK 200이 연인과의 드라이브에도, 홀로 떠나는 여행에도 잘 어울리도록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혹자는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이 작은 로드스터에 6,650만 원을 지불하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뒷좌석에 태워야 할 가족이 없거나, 혹은 이미 가족을 태울 만한 패밀리 카를 갖추고 있다면 2인승 로드스터도 불편함 없이 데일리 카로 탈 수 있다. 오히려 작고 민첩해 시내 주행도 편하고 주차 하기도 쉽다. 여성 운전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겠다.
한국의 날씨가 로드스터에 어울리지 않는다? 천만의 말씀. 봄에는 꽃바람을, 여름에는 바다내음을, 가을에는 낙엽소리를, 겨울에는 청명한 겨울공기를 느낄 수 있는 변화무쌍한 사계절이야말로 오픈 에어링을 위한 천혜의 날씨가 아닐 수 없다. 약간의 시선을 감수할 의향만 있다면 SLK 200과 같은 로드스터는 한국에서야말로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자동차다.
아직 늦지 않았다. 꽃이 다 지기 전에 SLK 200과 함께 새벽 드라이빙을 떠나보자. 시내든 근교든 어디든 좋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SLK 200은 안락하고 쾌적한 드라이브를 보장한다. 아마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망설이고 있는 그대, 봄바람 휘날릴 땐 연인과 함께 오픈 에어링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