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각 자동차 모델들이 ‘정통’임을 내세우던 때가 있었다. 정통 럭셔리 세단, 정통 SUV 등 순수한 세그먼트의 본질을 지켜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순수혈통임을 증명하는 큰 자랑거리였다. 가령 세단은 세단답게 조용하고 안락하며, SUV는 험지에서도 거침없고 뛰어난 공간활용도를 내세우는 식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정통 모델들은 남다른 아이덴티티를 지켜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크로스오버’의 열풍이 대중문화 전체로 확산되더니 이내 자동차에도 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많은 이종교배 실험이 이뤄졌다. 소형차, 심지어 경차를 기반으로 한 SUV도 등장했고 산을 넘어다니던 대형 SUV들은 럭셔리 세단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이어받아 도심의 요트로 변신했다. 세단은 쿠페의 날렵한 품새를 본따 4도어 쿠페로 진화했다. 바야흐로 크로스오버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BMW X6는 이러한 크로스오버 열풍의 절정과도 같은 차다. 승용차의 거주성과 SUV의 실용성 및 험지주파력을 합친 것도 모자라 쿠페라이크 스타일의 날렵한 바디까지 갖췄다. 무려 3가지 장르가 결합된 것이다. 이 낯선 조합은 퍽 성공적이었는지 BMW에서는 동생인 X4가 출시됐고, 메르세데스-벤츠나 아우디같은 경쟁사들도 GLE 쿠페, TTQ같은 유사품(?)들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어찌 보면 이미 포화상태인 기존 시장의 틈새를 꽉꽉 채우려는 제조사들의 노력이 가상할 정도다.
쿠페형 SUV의 원조 격인 BMW X6는 지난 해 11월 신형으로 탈바꿈했다. 외관에는 새 패밀리 룩이 반영됐고, 인테리어 역시 한결 고급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쿠페라이크 스타일의 아이덴티티는 그대로 지니고 있다. BMW 내부에서는 SAC(스포츠 액티비티 쿠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쿠페형 SUV, 2세대 X6 3.0d를 시승했다.
얼핏 보기에는 이전 세대와 외관 상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장, 전폭, 전고가 모두 조금씩 늘었지만 X6의 가장 큰 특징인 날렵한 루프 라인은 2세대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옆모습 역시 실루엣은 유사하되 캐릭터 라인이 추가되면서 보다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뒷모습은 BMW 특유의 ‘L’형 테일램프 역시 유지돼 볼륨감 넘치는 리어 스탠스를 완성하고 있다.
그나마 차이가 큰 부분은 전면부. 날렵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최신 BMW 디자인 큐를 받아들여 다소 뭉툭한 얼굴이 됐다. 이른바 ‘앞트임’ 디자인으로 불리는 라디에이터 그릴과 연결된 LED 헤드라이트, 위치를 옮긴 포그램프 등 전면부 디테일은 앞서 모델체인지된 X5의 그것을 빼 닮았다.
외관이 단순히 트렌드에 맞춰 바뀐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형상의 프론트 에이프런은 엔진룸과 브레이크의 냉각 뿐 아니라 공기저항계수를 섬세하게 고려한 디자인이다. 에이프런을 통해 들어온 바람은 앞바퀴를 감싸고 프론트 휀더 뒷쪽에 위치한 덕트로 빠져나간다. 이 역시 바퀴에서 발생하는 와류를 줄여주는 구조인데, 최신 BMW 모델들에 속속 적용돼 미적 완성도와 기능성을 모두 잡았다.
시승차량은 xDrive 30d 모델로, X6 라인업 중 가장 기본형 트림이다. 19인치 알로이 휠이 기본 장착되는데, 대구경 휠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넓은 휠 아치 때문에 작아보인다. 상위 트림으로 가면 20인치 알로이 휠이 장착된다. X6에는 거대한 20인치 휠이 가장 더 어울리는게 사실이다. 어쨌든 X6는 쿠페니까.
전반적인 익스테리어 디자인에 대해 좋게 보자면 성공적이었던 1세대의 바디와 세련된 최신 패밀리 룩이 적절히 조화를 이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기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바디 라인에 이미 익히 봐 온 얼굴만 씌워놓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세대 X6의 디자인이 워낙 완성도가 높았기에 기대가 큰 까닭일까?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풍겼던 예전의 디자인에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인테리어는 최신 BMW 스타일 그대로다. 가로로 뻗은 깔끔한 대쉬보드는 현 BMW SUV 라인업 중 최상위 모델답게 재질감 또한 기대 이상이다. 스티어링 휠은 특별히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지만 그립감도 우수하다. 마감 품질이나 사용 편의성 등 여러 면에서 평균을 상회하지만, 여느 BMW 모델과 전혀 차별화되지 않은 인테리어는 영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BMW 모델을 시승해봐도 각 모델들의 인테리어가 판박이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급 모델 구매자들은 보다 차별화된 인테리어를 원할 것이다.
뒷좌석의 경우 전고가 높아지면서 헤드룸 공간이 개선됐다. 덕분에 키 180cm의 성인 남성이 앉아도 특별히 불편함을 느낄 수 없다. 대형 SUV인 X5와 바디를 공유하기 때문에 2열 레그룸도 넉넉하다. 카시트 장착을 위한 ISO FIX를 지퍼로 감춘 마감이 돋보인다. ‘스포츠 액티비티 쿠페’를 표방하는 X6지만 여느 쿠페와 달리 뒷좌석에서는 아쉬움을 찾아볼 수 없다.
트렁크 용량은 평상 시 580L, 2열 폴딩 시 1,525L에 이른다. 2열 시트가 40:20:40 폴딩을 지원하는 점은 매력적이다. 낮은 루프라인 때문에 공간 활용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은 실용성을 보여준다.
시승차의 경우 컴포트 액세스 기능이 빠져 있어 도어락 개방을 위해서는 리모컨 키를 사용해야 했다. 테일게이트 간단 개폐 기능과 스마트 도어락 기능을 포함한 컴포트 액세스는 1억 1,690만 원인 xDrive 40d 모델부터 탑재된다. BMW가 유독 이 기능에 인색한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국산 경차에도 도입되는 기능이 9,990만 원짜리 차량에 빠져있는 것이 영 떫떠름하다.
그 밖에도 통풍 시트나 스티어링 휠을 능동적으로 조작해주는 차선유지보조장치 등의 편의사양은 상위모델에서도 탑재되지 않는다. BMW만의 다른 매력들이 있다고 해도 가격 대비 현저히 부족한 편의사양은 상품성을 깎아먹는 요소다.
BMW 모델을 시승할 때는 역시 주행 성능에 기대가 실린다. SUV라 할 지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쿠페를 자처하는 X6이니 더더욱.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X6는 디젤 엔진 뿐이다. 30d, 40d, M50d 등 세 가지 트림이지만 모두 3.0L 직렬 6기통 디젤 엔진에 각각 터보 차저 세팅의 차이로 구분된다. 시승차인 xDrive 30d는 트윈파워 터보 엔진으로 최고출력 258마력, 최대토크 57.1kg.m의 성능을 낸다.
앞서 시승해 본 X4 xDrive 30d와 동일한 엔진인데, 시동과 아이들링 시의 회전 질감이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상위 모델인 만큼 NVH 대책이 강화된 것. 여전히 스톱 앤 스타트 시스템이 작동할 때는 다소 충격이 전달되지만, 전반적으로 매끄러운 질감이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여기에 맞물린 8단 자동변속기는 여전히 깔끔한 레브매칭과 직결감이 뛰어난 변속 솜씨를 자랑한다.
운전석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운전석 사이드미러가 광각 타입으로 바뀌었다는 점. BMW 코리아는 오랫동안 운전석 사이드미러에 평면거울을 고집했다. 차선 변경이 잦은 국내 교통 환경 상 사각이 많은 평면거울은 위험할 뿐더러 운전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요소였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소비자들의 불만을 반영하여 사양을 개선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토크가 넉넉해 가속에는 처짐이 없다. 디젤 엔진의 특성 상 고회전에서는 힘이 빠지지만, 꾸준한 가속이 가능하다. X6 xDrive 30d의 최고속도는 230km/h, 0-100km/h 가속시간은 6.7초로 2톤이 넘는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여기에 구동력을 전후 0:100~100:0까지 배분해주는 xDrive 전자식 4륜구동 시스템 덕분에 노면 환경과 무관하게 안정적인 주행 성능을 자랑한다.
그런데 예상 외로 서스펜션 세팅은 퍽 무른 편이다. 급격한 코너링에서 자세가 형편없이 무너지지는 않지만, 댐핑 스트로크가 길고 255/50/R19 시리즈의 비교적 편평비가 높은 타이어를 장착해 롤링이 적지 않다. 추측컨대 상위 모델을 택하거나 M 스포츠 패키지를 장착하면 코너링 성능도 개선되겠지만, 아무리 엔트리 트림이라 해도 ‘스포츠 액티비티 쿠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무른 주행감각은 BMW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실 BMW 모델들이 물러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스포츠 모델임을 공언하는 M 라인업이야 여전히 손색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이지만, F10 5 시리즈 출시 이후로 전반적으로 예전처럼 예리한 맛이 떨어졌다. 2세대 X6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주행감각만 놓고 봤을 때 이 차가 BMW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편적인 SUV에 가까워졌다. 앞으로 이런 추세가 계속 될지는 미지수지만, 글로벌 판매 볼륨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취향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BMW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될 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BMW X6 는 논란의 여지 없이 세그먼트의 개척자다. 쿠페형 SUV 시장의 선구자인 X6는 분명 성공했고, 글로벌 브랜드들의 모델 개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경쟁사들은 이제서야 라이벌로 내세울 만한 모델들을 출시하고 있지만, 보란 듯이 2세대로 진화한 X6는 여전히 원조 다운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다. 변종 크로스오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러한 ‘정통’ 크로스오버를 논할 만한 입지까지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X6의 가치에 대해서는 보다 냉정한 시선도 필요하다. 형제차인 X5보다 트림에 따라 최대 500만 원 가량을 더 지출해야 하는데, 세련된 스타일만을 위해 그 만큼을 더 지출할 가치가 있을까? 심지어 공간 활용성은 X5보다 떨어지고, 쿠페형 SUV라 해도 실제 주행감각이 썩 스포티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게다가 가격대비 빈약한 편의사양은 더욱 망설이게 되는 요소다.
지난 2008년 처음 국내 시장에 출시된 이래로 X6는 매년 꾸준히 판매 성장을 이뤘다. 첫 해 114대가 팔린 X6는 2013년에는 1,058대까지 판매가 늘었다. 보수적인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X6의 스타일링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시장의 상황이 달라졌다. BMW가 수입차 업계 1위를 마크하고 있지만 수많은 경쟁자들이 무서운 기세로 맹추격하고 있다. 랜드로버, 포르쉐 등 SUV 시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라이벌이 부지기수다. 단순한 스타일링만으로 이런 경쟁자들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편의사양의 개선, BMW만의 남다른 주행 감각 등 장점을 살리기 위한 노력 없이는 결코 녹록치 않은 경쟁이 될 것이다. 새로운 X6를 시승하면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 것 또한 그런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