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하면 그 다음날 차가 팔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터스포츠 초창기의 이야기로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하고, 자동차의 성능을 증명함으로써 판매를 늘이기 위한 수단으로 모터스포츠카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스포츠카 메이커인 페라리를 창립한 엔초 페라리는 모터스포츠 자체를 사랑했고, 모터 스포츠를 운영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도로용 스포츠카를 만들어서 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고, 지금도 모터스포츠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수 많은 브랜드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모터스포츠의 세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F1 그랑프리에서 겨루는 많은 팀들 또한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팀 운영 자체가 사업인 팀도 있고, 자동차 회사가 아니면서도 회사 홍보와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서 F1에 뛰어든 팀도 있고, F1을 통해서 습득한 기술을 자사의 새로운 스포츠카의 성능을 높이는데 활용하는 페라리 같은 팀도 있다.
그런데 강력한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고 서민적인 중소형차를 위주로 생산하는 르노 역시 오랜 기간 동안 F1에서 수 많은 업적을 이룬 것을 생각하면 과연 르노 같은 회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2가지 힌트가 주어졌다. 하나는 르노그룹 파워트레인 담당 전략 부사장과의 인터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르노 F1 엔진 개발 연구소 방문이다.
지난 제네바 모터쇼 현장에서 르노그룹 파워트레인 담당 전략 부사장 브루노 코빈을 만났다. 선량한 눈매와 밝은 미소, 여유가 묻어나는 흰 턱수염이 멋졌던 브루노 코빈은 르노와 닛산 파워트레인의 첨단 엔지니어링과 전략을 담당하고 있는 부사장으로, 25년 전 르노그룹에 입사했으며 엔진 설계, 고급 엔지니어링, 디젤 튜닝, TCE 엔진 라입업의 프로젝트 디렉터를 역임하고 있다.
르노는 르노삼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조금 친숙해졌을 뿐 사실 르노 자체의 모델이나 역사, 파워트레인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래서 르노 엔진의 특성에 대해 물었다. 코빈 부사장은 르노 엔진은 3가지 전략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디젤 라인업을 중심으로 한 연비이며, 두 번째는 터보 직분사 시스템의 가솔린 다운 사이징, 그리고 마지막으로 EV(전기차) 라인업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연비, 친환경과 관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번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 보인 전기차 신형 조에(ZOE)의 최대 주행 거리가 210km에서 240km로 늘어나 효율성이 15% 증가한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효율성 위주의 엔진 개발 전략에 어울리도록 변속기 역시 CVT와 듀얼 클러치(DCT)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르노가 중소형차에서 연비와 실용성이 뛰어난 차들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클리오 RS 220 트로피, 메간 RS 275 트로피 같은 모델은 이름처럼 각각 220마력과 275마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 자동차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르노가 엔진 다운사이징과 다양화 면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사실 르노는 F1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는 직접 르노 F1팀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F1 엔진을 레드불 팀과 토로로소 팀에 공급하고 있다. 이런 F1과 르노의 양산차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었다.
“TCE 라인업 총괄이었던 분이 현재 F1 디자인 총괄을 맡고 있고, 양산 라인에 있던 40명의 엔지니어가 현재 F1쪽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F1 쪽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는 다시 양산 라인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술적인 정보 교환에 있어서 F1과 르노 양산차는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 정보 교환의 예로, TCE 엔진 피스톤의 외형 제작을 위한 탄소 커팅이 F1팀에 의해 제작된다. 또한 F1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는 현재 전기차 조에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인 F1에서 개발된 다양한 첨단 기술이 결국 합리적인 소형차를 선택하는 소비자에게까지 돌아간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최첨단 기술을 확보해서 더 빠른 스포츠카를 만드는 페라리와는 참 대조적이기도 하다.
르노의 F1엔진 기술에 관심이 커진 상태에서 이틀 후 프랑스 파리 근교에 위치한 르노 모터스포츠 연구소를 방문했다.
방문 절차 후 이뤄진 간단한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최신 F1 엔진의 기술적인 제원과, F1 엔진에 적용된 첨단 친환경 기술, 특히 르노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장점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제는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F1 엔진도 소형, 경량화, 과급기를 사용한 다운사이징이 필수이며, 거기에 더불어 흔히 하이브리드, 전기차에 적용되는 에너지 회생 재사용 기술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록 더더욱 F1을 통해 획득한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효율성이 뛰어난 서민의 차를 개선할 여지가 더 크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 르노가 대단해 보였다.
이 후 여러 실험실들을 둘러 보면서 가혹한 상황에서 최고의 효율성과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개발되고 있는 엔진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엔진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이 엔진을 공급받은 F1 팀들의 우승이겠지만, 이차적으로는 극한의 상황에서 발전된 혁신적인 기술들이 르노 자동차의 연비를 향상시키고, 운전의 재미를 더해주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르노가 F1에서 확보한 기술들이 적용된 최고의 엔진과 변속기, 섀시가 르노삼성을 통해서 한국 소비자들에게까지 전달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미 SM5의 TCE 엔진, QM3의 디젤 엔진과 DCT 등에도 이런 기술들이 스며들어 있으며, 향후에 더 다양한 파워트레인들이 우리 곁을 찾아 올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