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가 승용차 시장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9년 한국 시장에서 SUV 판매는 자동차 판매의 20% 정도에 불과했지만, 5년 만에 점유율이 29%까지 치솟았다. 이제는 신차 10대 중 3대가 SUV인 셈이다. SUV는 ‘큰 차’라는 기존의 생각과 달리 B-세그먼트 SUV까지 가세하면서 향후 소형차 시장에서도 SUV의 입김이 거세질 전망이다.
SUV가 세계 각지에서 인기 몰이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천후성이 최고의 강점이겠다. 높은 차고에서 비롯된 탁 트인 시야는 누구나 운전하기 수월하고, 넓은 공간도 매력적이다. 또 많은 모델이 선택 사양으로 제공하는 4륜 구동 시스템은 가벼운 임도 주행이나 궂은 노면 환경에서도 거뜬한 주행을 가능케 한다. 레저와 여가활동이 잦아진 현대 도시민들에게 SUV는 탁월한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지프 랭글러는 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SUV들의 모태가 된 지프, 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오프로더였던 원조 윌리스 지프의 직계 후손이다. 랭글러(Wrangler, 카우보이 내지는 조련사를 일컫는 말)라는 이름처럼 도시보다는 흙밭과 오지가 더 어울리는 데다 생긴 것부터 마초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작금의 업계가 크로스오버, 쿠페라이크 같은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신차들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섞어가는 와중에 랭글러는 사사로운 취향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의 자동차다.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자동차를 타는 것은 늘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로터스 엘리스같은 차들이 온로드 주행에서 타협 없이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면, 랭글러는 양산차 중 최상위급의 오프로드 성능을 자랑하는 상남자의 자동차다. 메르세데스-벤츠의 G 클래스, 랜드로버 디펜더, 토요타 랜드 크루저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순수 혈통 지프, 그 중에서도 오프로드 성능에 특화된 랭글러 언리미티드 루비콘 모델을 시승했다.
우선 복잡한 랭글러 집안의 족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랭글러는 크게 사하라와 루비콘으로 나뉜다. 사하라는 랭글러의 우수한 오프로드 주행성능을 살리되 온로드 주행을 고려하여 내외장의 마감 품질을 개선한 모델이다. 때문에 타이어도 주행소음이 덜한 것이 장착되고, 오프로드 기능 중 일부가 빠진다. 대신 가죽 시트, 바디 컬러와 동일한 탑과 휀더 등이 적용된다.
반면 지프의 오프로드 테스트 그라운드인 캘리포니아 주의 비포장 도로 ‘루비콘 트레일’에서 이름을 따온 루비콘 모델은 오직 오프로드를 위해 탄생한 모델이다. 양산차에 거의 탑재되지 않는 액슬 록과 전륜 스웨이 바 분리 기능 등이 탑재되고, 거친 오프로드에서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휀더를 포함해 모든 사이드 스커트와 범퍼가 무광 플라스틱으로 처리된다.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움보다는 기능성에 촛점을 맞췄다. 편의성을 포기한 강력한 오프로더인 셈이다.
랭글러에는 2도어인 숏바디와 4도어인 롱바디가 있는데, 롱바디 모델은 ‘언리미티드’라는 서브 네임이 붙는다. 그 밖에 숏바디 중 3.6L V6 가솔린 엔진과 소프트 탑이 탑재된 버전은 ‘랭글러 스포츠’라고 불리며, 이외에도 몇몇 한정 에디션이 존재한다.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특화된 수요에 대응한다는 뜻이다. 시승차는 4도어 언리미티드 모델의 오프로드 특화 버전인 루비콘.
랭글러의 외관은 영락없는 지프 그 자체다. 현행 지프의 로고에 들어가는 동그란 헤드램프와 7-슬릿 그릴은 랭글러에 그대로 적용돼 있다. 이는 70여년 전 세상에 처음 등장한 윌리스 지프에서 그대로 계승된 디자인이다. 사다리꼴의 각진 휀더와 툭 튀어나온 범퍼, 수직으로 떨어지는 측면과 후면의 바디 라인은 랭글러만의 독보적이고 뚜렷한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드러낸다.
후면으로 가면 거대한 스페어 타이어가 매달려 있고, 군용차처럼 각진 테일램프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프의 모습이 아닌가? 랭글러는 ‘지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트렁크는 분리형 탑을 고려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열린다.
분리형 탑, 그렇다. 자연을 더 가까이서 느끼고자 하는 상남자들을 위해 랭글러의 탑은 간단히 분리할 수 있다. ‘프리덤 하드탑’이라 불리는 랭글러의 루프는 세 조각으로 나눠진다. 1열 탑은 두 조각으로 나뉘며 몇 개의 레버를 푸는 것만으로 분리된다. 2열과 트렁크를 덮고 있는 거대한 뒷쪽 탑은 8개의 볼트만 풀면 분리가 가능하다. 탑을 아예 제거하는 것도, 별매 액세서리인 소프트 탑을 장착하는 것도 가능하다.
탑 분리 외에도, 랭글러는 여타 자동차와 다른 부분이 매우 많다. 힌지가 드러나 있는 도어 역시 탈착이 가능하고, 심지어 보닛은 외부에 드러난 잠금장치만 풀면 열 수 있다. 오프로드 돌파 중 야전 정비를 고려해 각부의 분해 조립이 간단한 것. 운전병으로 군생활을 한 운전자라면 흡사 군용차같다는 느낌을 차체 곳곳에서 받을 수 있다.
꼿꼿이 서 있는 도어를 버튼을 눌러 열어 본다. 철컥, 하고 열리는 감각조차 작금의 자동차와는 거리가 있다. 실내는 기능과 실용성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럼에도 현대적인 필수장비들은 갖추고 있다. 가령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탑재된 6.5인치 스크린과 후방 카메라 등이 그것이다.
다만 블루투스 핸즈프리는 지원하지만 음악 스트리밍 기능은 없다. 대신 내장 하드디스크가 장착돼 USB 등을 통해 음악을 차에 옮겨 담으면 재생이 가능하다.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가 너무 투박하고 조작하기 어려운 것이 흠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랭글러에게 내비게이션도 탑재됐다면 더 없이 좋을 뻔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요즘 모델에 비해 지나치게 뒤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사하라 모델에만 적용되는데, 추후 상품성 개선을 통해 루비콘에도 추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량 내부에서는 굵은 롤 케이지가 그대로 드러나며, 탑을 제거해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곳곳에 배치된 조명들이 눈에 띈다. 바닥 매트를 들어내면 배수 플러그가 위치해 있다. 덕분에 진흙탕을 뚫고 모험을 다녀와서도 실내를 간단하게 물청소할 수 있다. 랭글러가 기본부터 철저히 오프로드를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트는 심플한 직물 타입이 적용됐고 스티어링 휠이나 투박한 기어 노브, 중간 변속기 디자인도 실용성에만 촛점을 맞춘 형태다. 차가 꽤 커서 주차하기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 비해 뒷좌석 공간은 넓은 편이 아니다. 꼿꼿이 서 있는 뒷시트와 허벅지 받침이 부족한 방석 부분의 디자인이 아쉽지만, 뒷문을 열고 탑승할 수 있는 오프로더라는 것으로 위안삼자.
2열 시트는 폴딩도 가능한데, 헤드레스트가 자연스럽게 접히고 시트 아랫부분이 밀려 들어가면서 평평하게 폴딩되는 점은 매우 매력적이다. 시트 폴딩 기능에 일가견이 있는 크라이슬러 계열 모델의 장기 자랑이다. 폴딩 시 트렁크 용량은 무려 2,320L까지 늘어난다. 혼자 또는 둘이서 오지로 여행을 떠난다면 광활한 뒷공간에 온갖 생존도구를 챙겨갈 수 있겠다.
랭글러는 내외관도 근래의 모델들과 차이가 크지만, 압권은 단연 주행 성능이다. SUV들 조차 승차감이나 코너링 따위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최근의 트렌드에 랭글러는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덜덜거리지만 신뢰성 높은 2.8L 직렬 4기통 CRD 엔진은 최고출력 200마력, 최대토크 46.9kg.m의 성능을 낸다. 여기에 5단 자동변속기와 록-트랙(Rock-Trac) 파트 타임 4륜 구동 시스템이 조합된다. 0-100km/h 가속이나 최고속도 따위는 랭글러에게 무의미하다.
시내 주행에서 랭글러 루비콘의 주행 감각은 군용차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일상 주행이나 고속도로 주행이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도심형 SUV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245/75 R17 사이즈의 두꺼운 오프로드 전용 타이어는 주행 소음이 적지 않고, 튀어나온 휀더와 프론트 범퍼의 형상 때문에 의외로 사각도 있는 편이다. 특히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거나 평행 주차를 할 때에는 차폭감이 쉽게 느껴지지 않아 고생을 하기도 했다. 시내 주행 비중이 높고 가벼운 임도 주행 정도만 고려한다면 루비콘 보다는 안락하고 편의 사양도 풍부한 사하라 쪽이 더 어울리겠다.
하지만 진짜배기 오프로드 상황에 돌입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랭글러는 어떤 경쟁자도 돌파할 수 없는 극한의 주행환경을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간다. 보기에는 차고가 높아 보이지만 가벼운 하드탑과 넓은 트레드 등 경사진 험지에서도 전복되지 않는 안정성 높은 설계를 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오프로드 경쟁자인 G 클래스나 디펜더 등과 비교해도 탁월한 우위인데, 경쟁 모델들이 군용차로 사용되면서 적재능력이나 차체 사이즈 등에서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반면 랭글러는 순수하게 오프로드 주파 능력에 촛점을 맞추고 개발되었기에 생기는 차이인 것이다.
비포장 도로에 들어서 중간변속기를 4H로 옮겨 준다. 평상시에는 늘 2H(2륜 고속)에 두지만, 4H(4륜 고속)로만 바꿔도 임도 주행에 거침이 없다. 큰 자갈이 깔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거나 진흙탕 따위의 미끄러운 노면에서는 4L(4륜 저속) 모드로 변경하면 된다. SUV 모델의 경우 오프로드 주행에 얼마나 본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 확인하는 지표가 바로 저속 기어의 탑재 여부다. 랭글러의 경우 전 모델에 저속 기어가 탑재되고 있다.
저속 기어를 넣고 흙탕물을 튀기며 비포장 도로를 통과했다. 자신감이 붙어 발이 쑥 들어가는 모래사장에도 도전해 봤다. 마찬가지로 저속 기어를 넣고 탄력을 받아 움직이니 거침없이 모래밭을 달린다. 문제는 중간에 차가 멈춘 다음이었다. 아직 배가 걸리지는 않았지만 바퀴의 1/3 정도가 모래에 파묻힌 상황. 가속 페달을 밟아도 쉬 빠져나가지 못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 루비콘 모델에 탑재된 액슬 록 기능을 켜 보기로 했다.
전자식으로 작동하는 액슬 록 버튼은 스티어링 휠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말 그대로 구동축을 잠궈 여러 바퀴가 미끄러지는 상황을 돌파하는 시스템. 디퍼렌셜이 작동을 멈추고, 스티어링 휠을 틀자 뚝,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차가 요동친다. 3개의 바퀴가 미끄러져도 나머지 하나의 바퀴가 온전한 구동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각 바퀴가 약간의 트랙션을 모으면서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땅을 파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스로틀을 조정하자 이내 랭글러는 모래밭을 뚫고 튀어 나왔다.
그 밖에도 랭글러 루비콘에는 전륜 스웨이 바를 분리하는 기능도 탑재돼 있다. 바위나 큰 돌 따위를 밟으면 한 쪽 바퀴가 뜨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 경우 제대로 구동력을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스웨이 바(스태빌라이저 또는 안티 롤 바 라고도 불림)를 분리하면 댐핑 스트로크가 평상시보다 25% 길어지면서 접지력이 향상되고 장애물을 쉽게 돌파할 수 있다. 액슬 록과 스웨이 바 분리 기능은 사하라나 스포츠 트림에는 없고 오직 루비콘에만 탑재되며, 순정 상태에서 이러한 기능들을 탑재한 자동차는 결코 흔치 않다. 단연 오프로드 최강자 다운 퍼포먼스라 할 수 있겠다.
지프 랭글러 언리미티드 루비콘은 5인승 SUV 중 독보적인 오프로드 퍼포먼스를 자랑한다. 본격 오프로더 선택지가 많지 않은 국내에서는 토요타 FJ 크루저 정도가 경쟁 모델이지만, 둥그스름하고 여성적인 실루엣을 지닌 FJ 크루저와 비교하자면 거친 감각의 랭글러 쪽이 훨씬 마초적이다. 특히 도어와 하드 탑 등의 탈착을 통한 커스터마이징이나 뛰어난 정비성, 디젤 엔진의 높은 신뢰성 등은 랭글러 루비콘이 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조금 불편해도 좋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해도 매력이 철철 넘치니까. 실제로 지난 해 랭글러 전체 판매량을 보면 1,418대 중 랭글러 루비콘 모델이 946대로(2도어 포함) 판매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소비자들 역시 어중간한 편의성 보다는 제대로 된 오프로더를 선호하는 셈이다.
우리가 로터스, 케이터햄처럼 당장 서킷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는 하드코어 스포츠카들을 사랑하듯, 당장 산이나 바다로 내달릴 수 있는 랭글러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논란의 여지 없이 랭글러는 현존하는 어떤 SUV보다도 섹시하고 로맨틱한 상남자의 자동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