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레이스는 고스트의 스포츠 쿠페 모델이다. 롤스로이스에 웬 스포츠냐고 하겠지만 레이스는 분명 스포츠의 느낌을 잘 살려 냈다. 한 없이 부드럽기만 할 것 같은 롤스로이스가 레이스에다 파워풀한 가속력과 경쾌한 엔진 사운드, 그리고 정교하고 안정적인 주행감각을 잘 이식해 넣었다. 브랜드 중 가장 럭셔리한 롤스로이스에 차체 스타일 중 가장 럭셔리한 대형 쿠페가 어우러져 역동적인 주행 성능까지 갖춘 럭셔리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롤스로이스 시승기를 쓸 때마다 정리하는 것이지만 롤스로이스는 2개의 라인으로 구성돼 있다. 초(!)대형 럭셔리카인 팬텀 라인과 조금은 더 보급형이라 할 수 있는 고스트 라인이다. 팬텀은 전설적인 실버 고스트에서 시작해서 1925년부터 팬텀 시리즈로 꾸준하게 이어져 왔다. 고스트 라인은 최초의 롤스로이스 10, 15hp에서부터 시작해서 1930년대의 레이스, 실버레이스, 실버 돈 등으로 이어져 왔고, 2000년대 초 실버 세라프를 끝으로 잠시 공백을 가졌다가 2010년 고스트로 부활했다.
영국 굿우드에 새로 건설한 롤스로이스 공장에서도 팬텀 라인과 고스트 라인으로 구분되어 만들어지고 있다. BMW가 롤스로이스 브랜드를 인수한 후 굿우드에 최첨단 롤스로이스 공장을 건설하고 처음 선보인 팬텀 이후 팬텀 라인에는 ‘팬텀 쿠페’와 컨버터블 모델인 ‘팬텀 드롭헤드 쿠페’가 더해졌고, 고스트에는 지난 2013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인 쿠페 모델 ‘레이스’가 더해졌다.
이번에 고스트의 쿠페 모델인 레이스를 시승했다. 개인적으로는 팬텀 쿠페와 고스트에 이은 3번째 롤스로이스 시승이다.
롤스로이스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무척 많지만 우선 이름 이야기부터 하면, 잘 알려진 것처럼 최근에는 계속해서 유령과 관련된 이름을 짓고 있다. 팬텀과 고스트가 모두 유령을 의미하는데,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레이스 역시 유령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재미 삼아 각각의 유령을 구분해 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인간 세계를 떠 도는 유령, 곧 혼령이 팬텀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팬텀 오브 오페라’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상관없는 영적인 존재로 우리나라 도깨비와 비슷한 유령이 고스트일 것 같다. ‘꼬마 유령 캐스퍼’나 오래 전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를 떠올리면 되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유령인 레이스는 인간이 죽기 직전 혹은 직후에 나타나는 유령이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정확한지, 또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승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팬텀 쿠페는 그야말로 구름 위의 산책 같은 주행이었다. 쿠페임에도 역시 팬텀이었고, 역시 극한의 안락함이 추구됐었다. 차체는 정말 거대해서 서울 시내에서 주행할 때는 차의 폭이 차선을 꽉 채웠고, 사방에서 접근해 오는 차들에 옷깃이라도 스칠까 봐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릴 때나 외곽으로 나갔을 때는 도로 위에 군림하는 절대 지존 같은 탁월한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고스트는 초기에 나왔던 스탠다드 휠베이스 모델을 시승했었는데 팬텀에 비하면 한결 현실 세계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꿈에서 깨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꿈속인 듯한 주행감각에서 역시 롤스로이스라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다.
울트라 럭셔리라 불리는 롤스로이스 내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럭셔리의 극강 모델 고스트 라인업에 새롭게 더해진 모델은 고스트의 쿠페 모델 레이스다. 우리 입에 많이 익어 있는 레이스(Race)가 아니라 한글로는 어떻게 다르게 표기하기 어려운 ‘Wraith’다. 팬텀은 쿠페 모델에 그냥 팬텀 쿠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고스트에는 고스트 쿠페 대신 레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1930년 대의 레이스와 실버레이스에 대한 오마주다.
청담동 롤스로이즈 전시장에 도착하자 파란색과 은색의 투톤 차체가 돋보이는 늘씬한 쿠페 레이스가 나들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늘씬한 쿠페라고는 하지만 차체 스타일은 루프 라인이 차체 뒤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패스트백이다. 남들과는 다른 쿠페, 그리고 뒷좌석을 최대한 고려한 쿠페의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거기다 여전히 거대한 차체는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다.
레이스는 크기가 5,269 x 1,947 x 1,507mm에 휠베이스가 3,112mm다. 수치상으로는 S클래스나 7시리즈, A8의 롱휠베이스 모델에 비해 많이 크지는 않다. 실제로 고스트의 베이스 모델인 7시리즈 롱휠베이스 모델은 5,219 x 1,902 x 1,481mm에 휠베이스 3,210mm다. 고스트의 크기는 5,399 x 1,948 x 1,550mm에 휠베이스 3,295mm이므로, 고스트 보다는 조금 작다.
그런데 대형 세단의 롱휠베이스 크기인데 쿠페라는 점이 레이스의 키 포인트다. 벤틀리의 쿠페 컨티넨탈 GT는 세단 플라잉스퍼보다 많이 작다. 대형 쿠페를 보유한 메르세데스-벤츠는 S클래스 쿠페 정도가 비슷한 사이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레이스가 훨씬 거대해 보인다.
롤스로이스의 앞모습은 언제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신전을 형상화한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도 그렇고, 그 위에 우아하게 옷자락을 날리는 환희의 여신상도 그렇고. 환희의 여신상은 도어를 잠그면 자동으로 그릴 안 쪽으로 숨어 버린다.
거대한 휠 가운데 롤스로이스 엠블럼이 박혀 있는 휠 캡은 차가 달려도 항상 똑바로 서 있다거나, 도어를 열면 우산이 숨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팬텀과 고스트의 앞 도어는 일반적인 방식대로 뒤에서 앞으로 열리지만, 뒷 도어는 반대로 앞에서 뒤로 열린다. 반면 팬텀 쿠페와 레이스는 한 개 뿐인 도어가 앞에서 뒤로 열린다. 세단의 뒷 도어를 없앤 것이 아니라 앞 도어를 없앤 셈이다. 팬텀 쿠페와 레이스의 드라이버는 팬텀 세단과 고스트의 뒷 좌석에 타는 VVIP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차갑게 번쩍거리는 거대한 스테인레스 스틸 도어 핸들을 당기면 육중한 느낌의 도어가 열리는 느낌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고성의 오래된 철문을 여는 느낌이다. 물론 끼이익 하는 소리나 삐걱거림 없이 매끈하게 열리는 것이 차이다.
레이스는 팬텀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스트에 비해서도 키가 낮은 만큼, 시트 포지션은 롤스로이스 모델 중에서 가장 낮다. 그렇지만 쿠페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높다. 때문에 시트에 앉는 동작은 살짝 올라타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무척 우아하게 앉을 수 있다.
시트에 앉았으면 도어를 닫아야 하는데 도어 안 쪽 손잡이에 손이 쉽게 닫지 않는다. 손을 뻗되 상체까지 최대한 길게 뻗어야 겨우 손잡이를 잡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야 우아하게 시트에 앉은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준비했다. A필러 안쪽에 마련된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도어가 자동으로 당겨져서 닫힌다. 팬텀이나 고스트의 뒷좌석에 앉을 때도 그렇고, 쿠페들의 도어를 닫을 때도 매번 드는 생각인데 버튼을 눌러서 도어를 닫을 때 도어가 닫히다가 마지막에는 부드럽게 차체에 접근하고, 소프트 클로징으로 살짝 당겨주는 방식이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실제로는 당겨지는 속도 그래도 차체에 철컥하고 충격과 함께 닫히는 방식이 조금 아쉽다.
실내를 둘러보는데 팬텀에 비하면 확실히 현실적인 느낌이다. 바로크 시대의 궁정 연회장 같은 느낌이 조금은 줄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작은 버튼 하나 하나가 클래식한 감성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에어컨 공기 출구를 여닫는 크롬 손잡이의 존재감은 탁월하다.
레이스의 실내에서 고스트나 팬텀과 가장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스티어링 휠의 굵기다. 팬텀의 스티어링 휠은 림이 무척 가늘다. 클래식 카의 나무로 만든 거대한 스티어링 휠 느낌이 물씬하다. 하지만 레이스의 그것은 현대적인 럭셔리 세단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립감이 좋다. 달리기 직전 스티어링 휠을 잡을 손에 힘이 들어갈 때의 긴장감이 잘 묻어 나는 느낌이다.
가죽이면 가죽, 나무면 나무, 크롬이면 크롬,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다. 장인의 손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고 레이스가 장인이 만든 수퍼 럭셔리 ‘클래식’ 카는 아니다. 최 첨단 장비들이 다양하게 접목됐기 때문이다. BMW의 i 드라이브에 해당하는 환희의 여신상 로터리 컨트롤러는 다이얼 상단에 터치패드가 적용돼 글씨를 인식하는 신형이고,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어댑티브 헤드라이트, 스마트 키 시스템, 전자동 에어컨과 시트 냉난방 시스템, 트립컴퓨터 등도 빠짐없이 갖췄다.
하이엔드 렉시콘 오디오 시스템은 18개의 스피커를 통해 1,300w의 사운드를 뿜어낸다. 맑고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실내를 가득 채우면 최고의 연주가들을 초청해 음악을 연주하게 했던 품격 높은 어느 귀족의 거실 같은 느낌이 든다.
도어가 넓게 열리는데다 B필러도 없어서 뒷 좌석에 타고 내리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다. 거기다 뒷좌석 역시 넓고 안락하기가 이 만한 쿠페가 없다. VVIP가 직접 운전하는 쿠페이긴 하지만 뒷좌석에 함께 할 이들 역시 VVIP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들일 테니 이 정도는 갖춰야 하겠다.
레이스에는 고스트와 같은 V12 6.6리터 직분사 가솔린 트윈파워 터보 엔진을 장착했지만 최고출력 624마력으로 고스트의 563마력보다 61마력 더 높고, 최대토크도 1,500rpm에서 81.6kgm를 발휘해 고스트의 79.6kg.m보다 조금 더 높다. 덕분에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 가속하는데 4.6초 밖에 걸리지 않으며, 이는 고스트의 4.9초보다 0.3초 더 빠르다. 아우디 RS5가 4.5초, BMW M5가 4.3초, 포르쉐 911 카레라가 4.8초이니 이 거대하고 조용한 유령 쿠페가 얼마나 빠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속도는 시속 250km에서 제한된다.
시내로 들어서는데 분명 팬텀과는 차이가 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롤스로이스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겠지만 팬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차체가 주는 안심감이 크다. 첫 마디가 ‘이 정도면 충분히 운전할 만 하겠는데…’ 였다. 아, 어쩌면 팬텀을 운전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고스트나 레이스를 운전한다면 차체 크기에 대한 부담감이 대단히 클 수도 있겠지만 이미 팬텀에서 크기의 부담을 충분히 경험해 본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여유로워졌다는 이야기다.
엔진 응답성이나 스티어링 반응도 한층 경쾌해서 거대한 차체를 끌고 간다는 느낌이 전혀 없이 가뿐하게 움직여 준다. 분명 팬텀이나 고스트와는 다른 움직임이다.
올림픽대로에 접어들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듯하다. 올림픽대로 노면이 분명 이렇게 매끄러울 리가 없는데, 롤스로이스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도로공사에서 노면에 대패질이라도 한 듯 매끄럽게 달린다.
엑셀을 지긋이 밟자 즉각적으로 뻗어 나가는 반응에서 또 한 번 감탄이 나온다. 오! 이게 정말 롤스로이스 맞아? 순간 기분이 묘해지고, 이렇게 큰 차로 제대로 달리는 맛은 어떨지 궁금해지면서 속도를 높여 본다. 우와. 제대로다!
이 거대한 차체로 0~100km/h까지 가속 4.6초를 기록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사기 캐릭터’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폭발적으로 달려 나간다. 팬텀 쿠페와 고스트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분명 또 다른 차원의 롤스로이스이고, 롤스로이스가 보여 줄 수 있는 역동성의 정점을 경험하는 기분이다.
엔진 사운드도 꽤나 거칠어졌다. 빠르게 달려도 도무지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던 팬텀과는 차원이 다른 경쾌한 사운드다. 그렇지, 사운드도 이 정도는 돼줘야 달릴 맛이 나지.
하지만 롤스로이스는 역시 롤스로이스다. 차체가 큰 데다 다른 롤스로이스 대비 차고가 낮긴 하지만 이 정도의 가속력을 지닌 다른 스포츠 모델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높다 보니, 분명 빠른데도 부드러운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야기가 왔다갔다 하는데 결론은 부드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의 롤스로이스 모델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응답성과 단단한 달리기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이야기다. 그랜드 투어링 개념에서 볼 때 가장 럭셔리한 그랜드투어링 모델임에 틀림없다.
레이스는 분명 차원이 다른 롤스로이스다. 롤스로이스의 품격을 전혀 놓치지 않으면서 BMW의 역동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레이스를 구매하는 사람은 이미 팬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팬텀이나 고스트 대신 레이스를 선택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레이스는 최고의 격식을 갖춘 자리에도, 편안하게 여유를 즐기는 자리에도 모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리에 조금 늦었다면 엑셀을 조금 더 세게 밟아도 즐거운 롤스로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