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턴마틴이 국내에 들어왔다. 영국 프리미엄 GT 스포츠카 메이커 애스턴마틴은 007 제임스본드가 타는 차로 유명한 브랜드다. 미국 애스턴마틴 딜러에서 차를 공급받아 수입 판매하고 있는 ‘애스턴마틴 서울’은 지난 해 9월 청담동에 매장을 오픈하고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의 한 복판에 시승회를 통해 애스턴마틴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우선 007 이야기부터 잠깐 하자. 사실 이번에 국내에 수입된 애스턴마틴 모델 중 본드카로 사용된 모델은 없다. 007 영화에서 제임스본드가 타고 등장하는 본드카로 가장 유명한 모델은 애스턴마틴의 핵심 라인업인 DB 시리즈 중 5번째 모델인 DB5다. DB5는 여러 편의 007 영화에 등장하면서 자동차에서 미사일을 쏘기도 하고, 뒤에 표창이나 기름을 뿌리기도 하고, 지붕을 열고 사람을 쏘아 보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첨단 무기를 소화해 낸 007의 대표 본드카다.
제임스본드가 언제부터, 왜 애스턴마틴 DB5를 타게 됐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007 이야기의 시작을 다룬 2006년 개봉작 ‘카니노 로얄’ 편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됐었다. 제임스본드가 작전을 위해 추적하고 있던 악당과 카지노에서 카드 게임을 하던 중 돈이 떨어진 그 악당이 자기가 타고 있던 DB5를 게임에 걸었고, 본드가 그 게임을 이기면서 DB5가 본드의 차가 된 것이다.
본드카로 사용된 모델은 로터스 에스프리, 토요타 2000GT, BMW 7시리즈, Z8, 포드 썬드버드, 퓨전, 재규어 XKR 등 애스턴마틴 외에도 무척 많다. 그럼에도 본드카의 대명사는 언제나 애스턴마틴이었다. DB5 외에 V8 밴티지, 뱅퀴시, DBS도 본드카로 사용됐었다.
지금 현재 애스턴마틴의 라인업은 GT카 DB 시리즈의 최신모델인 ‘DB9′과 스페셜 모델 DBS, 수퍼카 ‘뱅퀴시’, 그리고 포르쉐 911의 경쟁모델인 컴팩트 스포츠카 ‘밴티지’, 4도어 스포츠 세단 ‘라피드’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77대만 한정 생산한 아주 특별한 한정판 모델 ‘ONE-77′이 있다. 쿠페 모델들에는 각각 컨버터블 모델이 더해지는데, DB9과 뱅퀴시는 ‘볼란테’라 부르고, 밴티지는 로드스터라 부른다. 모든 모델은 애스턴마틴 서울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애스턴마틴 서울이 판매를 시작한 후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수입, 판매하던 기흥모터스가 최근 애스턴마틴 한국 공식 딜러권을 획득하고 전시장을 준비 중이다. 따라서 애스턴마틴 서울과 기흥모터스의 애스턴마틴 코리아를 통해서 모두 구입이 가능할 전망인데, 향 후 딜러십과 관련해 어떤 관계 정리가 있게 될 지 아직은 미지수다. 애스턴마틴 서울도 최근 가산디지털단지에 자사 법인 호텔 건립과 함께 애스턴마틴 고객에게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 시승은 ‘애스턴마틴 서울’이 인천 영종도 네스트 호텔에 일부 자동차 전문 기자를 초청해 시승회 형식으로 이뤄졌다. 시승에는 컨버터블 모델인 DB9 볼란테와 4도어 스포츠 세단 라피드 S가 준비됐다.
기자는 먼저 라피드 S를 만났다. 길게 뻗은 차체와 낮게 웅크린 모습에서 동물적인 공격본능이 감지된다. 애스턴마틴 모든 모델들이 그렇듯이 군더더기 없는 앞모습이 공기의 벽을 뚫고 내 달릴 이미지도 선명하게 떠 오른다. 4도어 세단형이지만 롱노즈 숏데크의 스포티한 비례가 자극적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라인과 이미지는 지극히 우아하다. 역설적이라는 표현이 꼭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다.
차체 크기는 5m를 살짝 넘는다. 5,019×1,929×1,360mm에 휠베이스가 2,889mm다. 포르쉐 파나메라 터보 S의 5,015×1,931×1,418mm, 휠베이스 2,920mm와 거의 비슷한 크기다. 하지만 키가 58mm 낮은 데다 길게 뻗은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극도로 긴 노즈 등으로 인해 시각적인 차이는 엄청 크게 다가온다. 그 차이 만큼이 브랜드와 모델의 철학 차이이기도 하다.
긴 후드 아래 공간은 어마무시(?)한 V12 엔진으로 꽉 채워져 있다. 애스톤마틴은 전체 라인업 중 V12 엔진의 비중이 무척 높은 브랜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밴티지를 제외하곤 모두 V12 엔진이 얹히는데, 밴티지에도 V8 엔진과 함께 V12 엔진이 얹힌다.
라피드 S 2015년 형에 얹힌 6.0L V12엔진은 최고출력 558마력, 최대토크 60.8kg.m를 뿜어내며, 0-100km/h 가속 4.4초, 최고속도 327km/h의 강력한 성능을 발휘한다. 매장에서 판매되는 모델은 2015년형이다. 하지만 이날은 2014년형 모델을 시승했는데, 출력과 성능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강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수퍼카들은 0-100km/h 가속 시간이 왠만해선 3초대인 것을 감안하면, 3억이 넘고 최고출력이 558마력이나 됨에도 0-100km/h 가속이 4.4초인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애스턴마틴의 성격이 순수 스포츠카가 아니라 고성능 GT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예리하고 심플하지만 우아한 라인의 외관과 달리 실내는 극도로 화려하다. 특히 실내로 들어가기 전 비스듬히 위로 열리는 도어도 이 차에 신비감을 더하는 데 한 몫 한다. 도어에는 가스리프트가 적용돼 있어서 힘들이지 않고도 비스듬히 들어 올릴 수 있다.
실내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은 시트다. 특히 라피드 S의 시트는 가죽의 박음질이 특이하다. 시트의 윤곽을 따라서 파이핑 없이 박아 나간 스타일은 지금껏 보지 못한 화려함의 극치다. 그리고 시트는 보기에도 무척 단단해 보인다. 제임스 본드의 군살 없는 근육이 떠오른다.
라피드 S는 4도어 모델인 만큼 뒷좌석 시트도 무척 화려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른이 편안하게 타기에 뒷좌석은 많이 좁다. 실제로 시승 중 뒷좌석에 타 봤는데, 빠르게 달리는 롤러코스트에 몸이 꽉 조인 체로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아빠가 자녀를 뒷좌석에 태운다면 그렇게 빠르게 달리지도 않을 테니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운전석도 몸이 꽉 조여지기는 마찬가지다. 단단하게 잡아주는 느낌이 일품이다.
스티어링 휠은 화려하긴 한데 조금 더 과격한 디자인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육질도 조금 더 더하고, 아래를 D컷으로 잘라도 좋겠다. 스티어링 휠에는 뒷면에 시프트패들이 장착돼 있다. 알루미늄 재질에 소프트 플라스틱이 덧대져 촉감과 조작감이 뛰어나다.
스티어링 휠 너머 보이는 계기판은 정교한 크로노그라프 시계처럼 단단하면서 매우 정밀하게 움직일 것 같은 기대감을 더한다. 스포티하면서 화려하다. 오른쪽에 회전계가 자리하는데 회전계 바늘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반적인 계기판과는 달리 시계 반대 방향이어서 속도계와 회전계 바늘이 서로 등을 맞대고 오르락 내리락 한다. 신선하면서 때론 당황스럽기도 하다.
센터페시아는 좀 복잡하다. 솔직히 인테리어에서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실제 이날 시승에서는 달리기에 집중하느라 센터페시아에 어떤 기능이 있는 지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에어컨 조차도 조작해 보지 않았다. 시승을 마치고 돌아와서 뱅앤올룹슨 오디오를 감상하느라 잠깐 조작해 본 게 전부다. 애스톤마틴이란 그런 곳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되는 모델인가 보다.
센터페시아의 가운데에는 오디오와 에어컨 장치들이 있지만 위 아래에는 달리기를 위한 장치들이 배열돼 있다. 상단에는 가운데 시동을 거는 엔진 스타트 버튼을 중심으로 좌우에 변속기 P, R, N, D 버튼이 배열돼 있다. 링컨 모델들이 센터페시아 좌측에 세로로 변속 버튼을 배열하고 있는데, 링컨에서는 조작이 불편하고 디자인도 너무 심심하다고 했었는데, 애스턴마틴이 이렇게 버튼을 배열해 놓으니 마치 제임스본드가 이 버튼을 눌러서 뭔가 비밀스러운 작업을 연출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백하건데 편애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멋진 차에 버튼도 이렇게 멋지니 편애할 수 밖에.
센터페시아 맨 아래쪽에는 좌측에 서스펜션 모드 조절 버튼과 스포츠 모드 선택 버튼이 자리하고 있다.
시동은 센터페시아 중앙 상단에 애스턴마틴 로고가 그려진 홈에 키를 꽂고, 브레이크를 밟고 키를 누르면 걸린다. 등 뒤에서 갸르릉 거리는 우렁찬 사운드가 터진다. 다소 묵직한 V8 사운드와는 달리 카랑카랑한 날카로운 금속음이 섞여 있는 V12 엔진 소리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의 V12 사운드와도 조금 다르다. 첫 만남에서 그 사운드의 매력을 한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참 힘들다.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진다면 이 사운드의 매력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가고 싶어진다.
변속기 버튼들 중 맨 오른쪽의 D 버튼을 눌러서 출발한다. 익숙해지는 시간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도로로 나온 후에 조금씩 속도를 높여 본다. 신호에 걸렸다가 출발할 때는 강하게 가속도 해 본다. 긴 직선로가 나오면 엑셀을 끝까지 밟아도 본다.
이런 달리기들이 모두 신선하다. 우선 가속감은 제원상의 0~100km/h 가속 4.4초보다는 좀 더 짜릿한 느낌이다. 즉각적인 응답성과 두터운 토크감이 인상적이다. 다소 묵직한 가속페달을 힘주어 밟는 대로 등을 떠 미는 가속감이 아주 솔직하게 비례한다. 가속은 지칠 줄을 모른다. 최고속 영역까지 꾸준하게 밀어붙인다.
안정감은 상당히 뛰어나다. 솔직히 이번 시승에서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 안정감이었다. 과거 DB7과 초기 뱅퀴시와 뱅퀴시 S 모델 몇 대가 국내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평가는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빠른 재규어의 이미지로 비쳐졌었다. 그 후 애스턴마틴과 재규어는 다른 길을 가게 됐고, 실제로 디자인에서는 그 당시와는 확연히 다른 예리한 우아함이 제대로 살아 났다.
그런 변화가 주행감각에서는 어떻게 나타날 지가 궁금했는데, 라피드 S의 주행 감각은 기대 이상으로 샤프하고, 기대 이상으로 안정적이었다. 노면이 썩 좋지 않은 구간이 많아서 자잘한 요철 정보들이 단단한 시트를 통해서 아주 세밀하게 전달되지만, 그 속에서 영국식 GT 카 특유의 여유가 묻어난다. 노면이 좋은 고속도로를 달린다면 이 차가 가진 잠재력을 모두 쏟아내면서 우아하면서, 극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겠다.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면 엔진에 대한 응답성이 살짝 높아진다. 기어 변환 로직이 바뀌면서 고회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이지, 돌변하는 정도는 아니다. 배기 사운드도 특별히 더 거칠어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의 초고성능 GT 세단이라면 항상 스포츠 모드로 달리고 싶어질 것 같다. 서스펜션도 스포츠 모드가 되면 조금 더 단단해진다.
스포츠 모드에서는 시프트 패들을 사용해 12기통 엔진의 강력하지만 매우 잘 조련된 성능을 원하는 대로 조종해 나가는 맛이 일품이다.
라피드 S의 엔진 사운드, 응답성, 폭발적인 달리기, 단단한 시트와 매우 안정적인 주행 등이 만들어내는 주행 느낌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과 아슬아슬한 벼랑 끝으로 치닫는 로맨스를 펼치는 느낌이랄까? 그 짜릿함에 자꾸만 빠져들고 싶어 진다. 파나메라나 콰트로포르테가 주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짧은 시승을 마치고 오디오를 켜니 ‘안드레아 보첼리’의 목소리가 뱅앤올룹슨을 타고 섬세하고도 강력하게 흘러 나온다. 누구의 센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탁월한 선곡이었다.
이번엔 DB9 볼란테 차례다. 애스턴마틴의 핵심 라인업인 GT 스포츠카 DB9의 컨버터블 모델이다. 4도어 세단인 라피드 S보다는 작지만 스포츠 쿠페로서는 상당히 큰 사이즈인 4,720×2,061×1,282mm에 휠베이스 2,740mm를 자랑한다. 역시 늘씬하게 뻗은 바디라인에 절정의 예리함이 잘 살아 있다.
실내는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지만 시트의 느낌이 조금 다르다. 시동을 걸자 엔진 사운드도 더 우렁차다. 도로로 나서서 신호에 걸렸을 때 지붕을 열었다. 약 40km/h 정도까지는 주행하면서도 지붕을 열 수 있다. 참고로 포르쉐는 60km/h 정도에서도 열 수 있다.
DB9 볼란테에도 역시 V12 엔진이 얹히는데, 최고출력은 517마력, 최대토크는 60.8kg.m를 발휘하며, 6단 자동 변속기와 어울려 0~100km/h 가속 4.6초, 최고속도 295km/h의 성능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붕을 열고 도로 위에 올라가자 가속감은 라피드 S보다 더 짜릿하다. 사운드도 더 강렬하다.
하체에서 전달되는 느낌에서 라피드 S보다 오히려 불안한 느낌이 전달된다. 이 차가 ‘DB9′이라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볼란테’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있어서였다. 컨버터블 모델이니 당연히 강성이 조금은 더 약할 수 밖에 없다. 볼란테라는 점을 감안하고 달리기 시작하자 의외로 컨버터블 치고는 꽤 높은 강성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라피드 S보다 차체 강성과 중량 부분에서 손해를 보긴 했지만 하체는 더 단단하다. 고속 직진과 코너링에서의 안정감도 무척 뛰어나다. 물론 안정적이고 단단한 주행 감각 속에서 영국식 GT 스포츠카의 여유는 잘 살아 있다. 영국 감성을 타고난 애스턴마틴의 여러 볼란테 모델들이야 말로 진정한 GT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다르게 말하면 500마력이 넘는 V12 엔진을 얹은 예리한 라인의 스포츠카이긴 하지만 순수한 스포츠카로서는 부족함이 많다는 뜻도 된다. 애스턴마틴은 그런 차다.
라피드 S와 DB9 볼란테를 시승하고 나자 시선은 의외로 라피드 S로 더 많이 향한다. 길이 5m가 넘는, 거대하지만 낮고 예리한 라인을 가진 이 4도어 GT 세단의 잠재력이 정말 기대이상이다. 영국식 부드러움으로 인해 짜릿한 맛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시승을 통해 확실하게 해소됐다. 럭셔리 GT 수퍼카가 지향해야 할 안락함과 날카로움을 매우 정교하게 잘 조합해 낸 듯하다. 매일매일 아슬아슬하고도 치명적인 매력에 푹 빠지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