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와 환경은 그 나라의 자동차 문화 양식을 결정짓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도로가 좁고 주차공간이 제한된 일본에서는 냉장고같은 경차가 몇 년째 인기를 끌고 있고, 스모그로 골머리를 앓는 중국인들은 전기차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노면이 좋지 않은 프랑스의 자동차는 요철을 걸러내는 서스펜션 세팅이 일품인 반면 평균속도가 높은 독일 자동차들은 고속안정성이 뛰어나다. 이처럼 각 나라의 자동차들은 그 나라의 다양한 여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멀지 않은 호주 역시 독특한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홀덴, 포드, 토요타 등 호주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던 업체들이 2017년까지 철수를 선언하며 호주 자동차 산업은 위기를 맞고 있지만, 90년에 가까운 자동차 역사를 지닌 만큼 호주 고유의 자동차들이 쉬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오직 호주에만 있는 가장 독특한 자동차가 바로 UTE(유트)이다. ‘쿠페 유틸리티’ 또는 ‘유틸리티’의 약자로 알려진 UTE는 호주에서 80년이 넘게 생산되어 온 픽업트럭의 일종이다. 다만 일반적인 픽업트럭이 상용차의 섀시로 만들어지는 것과 달리, UTE는 승용차의 섀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UTE의 역사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 빅토리아 주에 살던 한 농부의 아내는 포드 오스트레일리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 즉, ‘주일에는 교회에 타고 가고, 월요일에는 우리 농장의 돼지를 싣고 시장에 갈 수 있는 차’를 만들어줄 수 있냐는 것. 포드의 젊은 디자이너 루 반트(Lew Bandt)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쿠페를 기반으로 한 트럭을 디자인했고, 1934년 최초의 UTE인 포드 ‘쿠페 유틸리티’가 탄생했다. 초창기에는 이 모델의 파생형으로 컨버터블 버전인 ‘로드스터 유틸리티’도 만들어졌다. 이후 1951년 홀덴이 48-215 세단을 바탕으로 한 ‘유틸리티’ 모델을 출시하면서, UTE 시장에서의 오랜 라이벌이 탄생했다.
다른 시장에서 UTE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GM은 호주에서 탄생한 UTE의 가능성을 보고 북미 시장에도 승용 바디의 픽업트럭을 선보였는데, 쉐보레 쉐벨을 바탕으로 한 ‘엘 카미노’같은 모델들은 편의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챙기며 나쁘지 않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미 다양한 픽업트럭 라인업을 갖춘 북미에서 UTE 형태의 승용 픽업은 확고한 입지를 세우지 못하고 자연히 도태되었다.
UTE의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승용차의 섀시를 유용한다는 것이다. 적재량은 약 3/4t 정도이며 포드는 포드 팰콘, 홀덴은 코모도어의 바디를 사용한다. 때문에 호주인들은 UTE를 상용차가 아닌, 화물 적재에 특화된 승용차로 보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토요타 하이럭스, 홀덴 콜로라도 등 소형 픽업트럭도 큰 의미의 UTE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UTE는 차체와 적재함이 분할되어있지 않고, 적재함 바닥이 평평하지 않은(well-back 타입) 것을 뜻한다. 포드 팰콘 유틸리티 모델은 1999년부터 적재함을 차체와 분리시키고 평평한 1톤 적재함 라인업을 추가했는데, 이것을 UTE라고 불러도 될 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UTE는 호주 자동차 문화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호주인들의 UTE 사랑은 많은 부분에서 드러난다. 특히 ‘UTE 머스터즈’라고 하는 UTE만의 카 페스티벌이 존재할 정도. 데닐리퀸 지역의 UTE 머스터즈는 호주 최대의 행사로 잘 알려져 있는데, 캥거루 범퍼와 탐조등, 대형 머드플랩 등으로 치장한 최고의 UTE 선발대회 등이 치뤄진다.
이 밖에도 가장 살벌한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로 유명한 호주 ‘V8 슈퍼카 시리즈’에도 UTE 클래스가 존재한다. 출전 모델은 포드와 홀덴 두 종류 뿐이지만, ‘짐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살벌한 성능을 과시하며 비좁은 코스에서 치열한 레이스를 선보인다.
한 때 스바루, 토요타 등 몇몇 외산 브랜드들도 UTE 시장에 진출했지만, 오늘날까지 정통 UTE를 만드는 회사는 포드 오스트레일리아와 홀덴, 둘 뿐이다.
UTE의 원조라는 자부심이 있는 포드 오스트레일리아는 비교적 최근 모델체인지 된 팰콘을 바탕으로 UTE를 생산하고 있다. 기존 팰콘이 글로벌 시장의 포드 디자인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반면, 새로운 14년형 팰콘은 글로벌 디자인 DNA를 적극 반영하여 퓨전, 토러스 등의 모델을 연상시킨다.
팰콘 UTE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1톤 플랫 적재함을 장착한 캡 섀시 모델과 일체형 적재함을 장착한 스타일사이드 박스 모델로 나뉜다. 엔진은 265마력의 4.0L 직렬 6기통 엔진이 기본이며, 최상급인 XR6 터보 트림에서는 367마력의 4.0L 직렬 6기통 터보 엔진이 제공된다.
반면 홀덴 UTE는 북미에서 쉐보레 SS, 영국에서 복스홀 VXR8로 판매되는 코모도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코모도어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데, 80년대에는 대우 로얄 살롱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으며, 코모도어의 형제차인 스테이츠맨, 카프리스 역시 GM대우를 통해 스테이츠맨, 베리타스 등으로 출시된 적이 있다.
홀덴 UTE는 플랫 적재함 버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285마력의 3.6L V6 엔진이 기본 탑재된다. 상위 트림인 SS V-시리즈에는 6.0L V8 OHV 엔진이 탑재되는데, 최고출력은 367마력에 달한다. 홀덴 UTE는 후륜에 독립형 서스펜션을 장착해 승차감과 안정성에서 포드 UTE를 뛰어넘는 장점을 지닌다.
독특하게도 BMW M, 메르세데스-벤츠 AMG처럼 포드 오스트레일리아와 홀덴은 모두 호주 시장에만 선보이는 고성능 디비전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FPV(Ford Performance Vehicles)와 HSV(Holden Special Vehicles)이다.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FPV와 HSV는 각각 고성능으로 튜닝된 UTE를 선보이고 있다.
아직 새 팰콘 UTE의 고성능 버전은 출시되지 않았지만, FPV는 여전히 이전 세대 팰콘 UTE의 고성능 버전을 판매하고 있다. 이 고성능 UTE에는 포드 머스탱 보스 302와 동일한 5.0L V8 슈퍼차저 ‘보스’ 엔진을 탑재하여 최고출력은 약 430마력, 최대토크는 약 55.6kg.m에 이른다. 여기에 고성능 듀얼 배기 시스템과 스포츠 브레이크, 19인치 알로이 휠이 추가되어 웬만한 스포츠카 못지 않은 성능을 자랑한다.
한발 더 나아가 HSV는 고성능 UTE인 ‘말루’ 라인업에 기본적으로 441마력을 내는 6.2L V8 LS3 엔진을 탑재하는데, 이는 쉐보레 콜벳과 동일한 엔진이다. ‘R8′ 트림을 선택하면 출력은 462마력으로 올라가며, 20인치 알로이 휠과 4 피스톤 고성능 브레이크, 트윈 듀얼 배기 시스템이 기본 장착된다.
UTE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홀덴 ‘GTS 말루’도 한정판으로 출시된 적 있다. 6.2L V8 슈퍼차저 LSA 엔진은 카마로 ZL1, 캐딜락 CTS-V 등과 같은 엔진으로 최고출력은 무려 584마력, 최대토크는 75.5kg.m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20인치 단조 알루미늄 휠, AP에서 세팅한 6 피스톤 단조 캘리퍼와 전륜 390mm, 후륜 372mm 2피스 디스크 로터가 장착되었다. 이 괴물같은 성능을 통제하기 위해 토크벡터링 기능과 전자식 자세제어장치가 추가되었다.
호주에서 운전을 하게 된다면, 이 생전 본 적 없는 독특한 픽업트럭과 경쟁이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사롭지 않은 바디킷과 대구경 휠, 듀얼 배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브랜드를 막론하고- 굉음을 내며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