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브랜드들은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보다 특별한 모델의 개발에 과거 어느 때보다 열중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시장에서 전례없는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 이른바 ‘독일 3사’는 너나할 것 없이 라인업을 잘게 쪼개고 있다.
라인업 세분화에 가장 열심인 브랜드는 BMW이다. 한 때 3, 5, 7 시리즈 등 심플한 라인업만 지니고 있었던 BMW는 이제 1~7에 이르는 모든 숫자의 라인업을 완성시켰으며 SUV인 X라인업, 고성능 디비전인 M, 친환경 전기 디비전인 i 등 일일히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모델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모델명도 바뀌었다. 컴팩트 세단인 3시리즈는 F30 세대로 넘어오면서 쿠페와 컨버터블 모델을 4시리즈로 분리시켰다. 이로써 4도어/5도어 모델은 3시리즈, 2도어 및 컨버터블 모델은 4시리즈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4시리즈 그란쿠페는 그러한 3시리즈와 4시리즈의 경계선에 서있는 모델이다. 앞서 선보인 6시리즈 그란쿠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란쿠페(Gran Coupe)’는 BMW의 4도어 쿠페를 일컫는 이름이다. 4시리즈 그란쿠페 역시 쿠페의 날렵한 디자인과 세단의 편의성을 합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3시리즈와는 다른 모델이지만, 코드명을 통해 먼 친척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3시리즈 세단의 코드명은 F30이며 투어링이 F31, 4시리즈 쿠페가 F32, 4시리즈 컨버터블 F33, 3시리즈 GT F34, 3시리즈 롱휠베이스(중국형) F35, 그리고 가장 최근 라인업에 추가된 4시리즈 그란쿠페가 F36이다.
현재 국내에는 420i와 420d xDrive 등 두 가지 파워트레인의 4시리즈 그란쿠페가 선보이고 있다. 디젤엔진과 4륜구동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국내 시장 분위기를 감안할 때 사실상의 볼륨모델은 420d xDrive가 될 것이다. 조금 특별한 색깔을 지니고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420d xDrive 그란쿠페를 만나보았다.
4시리즈 그란쿠페가 내세우는 차별화된 세일즈 포인트는 익스테리어이다. 4시리즈의 유선형 쿠페 디자인을 이어가되 세단의 실용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BMW의 설명. 때문에 쿠페답게 프레임리스 도어가 채택되고 3시리즈에 비해 한결 좁은 숄더 라인이 이어진다. 옆에서 봤을 때는 낮은 루프라인과 호프마이스터 커브의 형상이 3시리즈와 구분되며, 프런트와 리어 디자인은 4시리즈의 모습 그대로다.
420d xDrive 그란쿠페 기준 전장*전폭*전고가 4,638*1,825*1,404(mm)인데, 420d xDrive 쿠페보다 12mm 높아졌지만 여전히 320d xDrive 세단보다는 25mm나 낮다. 더 길고 넓은데 훨씬 낮으니 도어만 4개일 뿐 쿠페라이크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4시리즈 그란쿠페가 가장 차별화되지 못하는 부분 역시 익스테리어 디자인이다. 유감스럽게도 도로 위에서 한 눈에 4시리즈 그란쿠페와 3시리즈를 구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3, 4시리즈가 나눠진 것이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 디자인에 3시리즈의 잔향이 짙게 남은 까닭이다. 형님뻘인 5시리즈와 6시리즈 그란쿠페가 스타일링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3시리즈와 4시리즈가 서로를 빼닮은 것은 패밀리룩의 까닭이 클 것이다. BMW는 최신 모델들에게 예외없이 앞트임된 헤드램프와 ‘ㄴ’자 형태의 테일램프를 장착하고 있는데, 프런트와 리어 디자인이 차량의 이미지를 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는 만큼 이들이 비슷하면 비슷한 디자인처럼 느껴진다. 패밀리룩이라는 이름으로 디자인이 획일화되는 것을 좋아하는 소비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추후 부분변경을 통해 3, 4시리즈의 디자인이 차별화된다면 더욱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4시리즈 쿠페와 크게 다르지 않다. 1열과 센터페시아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덕분에 4도어가 되었지만 쿠페 특유의 낮은 시트포지션은 그대로 유지된다. 웬만한 스포츠카보다 낮은 시트포지션은 쿠페다운 주행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인테리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센터페시아는 4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최신 BMW 디자인 트렌드에 따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많은 차량제어 시스템과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iDrive로 통합되었다. 센터페시아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두터운 센터콘솔이 운전석 쪽은 넉넉히 공간이 파여있는 반면 조수석 쪽은 레그룸을 옆에서 압박해 좁게 느껴지는 부분은 지적사항이다. 조수석에 탑승해본 동승자들은 예외없이 좁은 레그룸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다.
2열 뒷좌석 공간은 사용에 큰 불편이 없다. 전장과 휠베이스는 4시리즈 그대로지만, 도어가 추가되어 타고 내리기가 훨씬 수월하다. 전고가 높아지면서 뒷좌석 헤드룸도 쿠페에 비해 더 확보되었다. 180cm 이상의 남성이 앉기에는 조금 낮지만 여성이나 어린아이가 타기에는 전혀 부담없다. 낮은 2열 탑승의 불편함 때문에 4시리즈 쿠페를 선택하지 못한 소비자라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시리즈 그란쿠페의 트렁크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다. 겉보기에는 차이점을 못 느끼지만 열어보면 리프트백 방식으로 리어윈도우까지 한번에 열린다. 전동식일 뿐 아니라 범퍼 밑으로 발을 넣으면 자동으로 열리는 컴포트 액세스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트렁크 입구가 넓은 덕분에 활용도도 높다. 트렁크 기본 공간이 480L로 늘어났으며, 2열 시트를 폴딩하면 1,300L까지 늘어난다. 이같은 기능성은 3시리즈 GT의 장점을 따온 것처럼 느껴져 기특하다.
사실 이 독특한 트렁크는 낮은 루프라인을 유지하되 도어를 늘리다보니 일반적인 오픈 방식으로는 트렁크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을 개선하기 위한 디자인이다. 한 편으로는 유일한 동급 경쟁자인 아우디 A5 스포트백에 대한 견제의 목적도 있다. 어쨌든 스타일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실용성을 챙긴 데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420d xDrive 그란쿠페는 BMW의 베스트셀러 디젤엔진인 2.0L 트윈파워 터보 디젤엔진(N47)을 탑재하고 있다. 최고출력 184마력, 최대토크 38.8kg.m으로 일상주행에서 전혀 부족함을 느낄 수 없다. 제원상 최고속도는 229km/h, 0-100km/h 가속시간은 7.5초에 불과하다. 4도어 쿠페에 디젤엔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정도 성능이면 출력부족은 느껴지지 않는다. 함께 맞물린 8단 자동변속기 역시 BMW 답게 빠른 변속과 우수한 직결감, 적극적인 레브매칭 실력을 뽐낸다.
4시리즈 그란쿠페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서스펜션 세팅이다. 운전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BMW이지만, 최근에는 좀 더 보편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반모델의 서스펜션이 너무 부드러워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4시리즈 그란쿠페는 그러한 지적에 정면으로 반박하듯 상당히 탄탄하고 쫀득한 하체 느낌을 자랑한다. 4시리즈 쿠페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 더불어 세단보다 시트포지션과 무게중심이 낮기 때문에 주행 중 휘청임을 느낄 수 없다. 앞서 3시리즈와 외관 상 크게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주행감각 만큼은 3시리즈와 확실히 구별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xDrive 상시 4륜구동 시스템이다. BMW의 전자식 4륜구동인 xDrive는 전, 후륜 모두 100%의 동력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 수시로 동력배분을 조절하기 때문에 코너를 통과할 때에도 거동이 둔하지 않다. 코너 진입 시에는 마치 후륜구동처럼 날렵하고, 조금이라도 오버스티어의 낌새가 보이면 동력을 전륜으로 배분하여 뉴트럴하게 코너를 탈출한다. 스포츠 드라이빙에서도 안정적이고,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한국의 겨울날씨에는 더욱 요긴하다.
사실 쿠페와 스포츠카는 동의어가 아니지만, 세단이나 다른 바디 타입에 비해 쿠페의 스포츠성에 더 많은 기대를 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쿠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4도어 쿠페도 세단보다 스포티한 디자인에서 비롯된 스포티한 주행감각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4시리즈 그란쿠페는 그러한 운전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한 달리기 실력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매력 포인트가 바로 연비다. 4륜구동 시스템이 추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20d xDrive 그란쿠페의 공인연비는 15.6km/L에 달한다. 실제로도 공인연비를 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효율을 신경쓰지 않고 주행해도 시내연비는 15km/L을 쉽게 달성하며, 고속도로에서는 18km/L까지 올라간다. 우수한 주행성능과 연비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420d xDrive 그란쿠페에서 만큼은 예외라고 해두자.
420d xDrive 그란쿠페는 차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자동차다. 잘 생겼는데 실용성도 좋고, 잘 달리는데 효율도 좋다. 훈남 외모에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같다. 이쯤 되면 뭐든 잘하는 420d xDrive 그란쿠페가 조금 얄밉기도 하다. 라이벌들이 시샘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 않는가?
물론 이렇게 잘난 구석뿐인 420d xDrive 그란쿠페를 만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다. 420d xDrive 그란쿠페의 가격은 6,110만 원으로, 같은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320d xDrive(5,270만 원)는 물론 420d xDrive 쿠페(5,870만 원)보다도 비싸다. 이 가격차이를 선뜻 감수할 만한 스타일링이 다시 한 번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자. 어쨌든 420d xDrive 그란쿠페는 많은 장점을 한 데 모아둔 모델이다. 세단의 안락함과 쿠페의 스포티함, 왜건과 GT의 실용성이 모두 합쳐진, BMW 라인업의 총집합과도 같다. 이렇게 멋진 차를 만나는 데에 아까울 것은 없다. 게다가 경쟁모델인 A5 스포트백 역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만큼 4시리즈 그란쿠페의 성공을 점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찌됐든 가장 늦게 4도어 쿠페 영역에 진출한 BMW지만, 경쟁자들은 단단히 긴장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 그래왔듯 새로운 세그먼트에서도 BMW는 인기를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420d xDrive 그란쿠페의 완성도는 그러한 의견에 확신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