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서킷에서 승리만을 위해 질주하는 레이스카들은 모든 자동차 매니아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한계까지 성능을 끌어올린 엔진과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고강성 차체는 오직 레이서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몇 레이스카들은 서킷을 나와 일반도로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그 중에는 레이스카의 우승이나 활약을 기념하기 위해 공도용으로 손본 로드카도 있지만, 레이싱에 출전하기 위한 호몰로게이션(Homologation) 모델들이 대표적이다.
호몰로게이션이란 직역하면 승인, 인가 등을 의미하지만, 모터스포츠에서는 레이싱 출전을 위한 형식승인을 의미한다. 호몰로게이션을 받지 않은 차는 해당 대회에 출전이 불가능하다. 호몰로게이션 모델이란 좀 더 레이스카에 가까운 형태로 이 호몰로게이션을 따내기 위해 해당 대회 규정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산만 이뤄진 양산차를 뜻한다.
전용 프로토타입을 사용하는 포뮬러 레이스나 르망24시 내구레이스의 LMP 클래스 등은 양산규정이 없지만, 양산차를 기반으로 하는 GT 레이스, 랠리 등은 출전하는 모델이 일정 댓수 이상 생산될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500대 이상 생산된 차량만 출전 가능한 대회가 있다면, 거의 레이스카와 같은 성능의 호몰로게이션 모델을 500대 가량 한정생산하는 방식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이 규정을 통해 더 적은 부담으로 고성능 모델을 경기에 출전시킬 수 있고, 레이스카에 로망을 가진 일반인들은 돈만 있다면 레이스카를 경험할 기회를 얻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일석이조라고 하겠다.
여기에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5대의 호몰로게이션 모델들이 있다. 2000년 이전에 생산되어 지금은 그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매니아들에게 회자되는 전설적인 차들이다. 서로 다른 레이스 대회에서 활약한 이들 중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보시라. 여전히 도로를 달릴 수 있으니 솟구친 경매가를 지불할 수 있다면 언젠가 내 차고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 “가장 비싼 자동차”의 명성: 페라리 250 GTO
얼마 전 미국 본햄스 경매에 등장한 페라리 250 GTO가 무려 3,811만 달러(한화 387억 원) 가량에 낙찰되면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오직 39대 밖에 생산되지 않은 250 GTO는 매물이 등장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얼마에 판매될 지 관심을 모은다. 이번 경매 이외에도 2012년에는 3,500만 달러에 낙찰된 적이 있었으며, 지난 해에도 개인거래에서 5,200만 달러(한화 약 528억 원)에 거래되는 등 250 GTO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 중 하나로 명성이 자자하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단 3년 간 생산되었던 250 GTO는 FIA의 그룹3 GT 레이스에 출전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페라리의 쿠페 250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름의 “GTO”는 “Gran Turismo Omologato”의 약자로 GT 레이스 호몰로게이션 모델임을 의미한다. 원래 당시 규정에 따르면 그룹3 GT 출전차량은 적어도 100대 이상 생산되어야 했는데 어떻게 39대 만 생산되고도 출전이 가능했는지는 미스터리이다. 일설에 따르면 엔초 페라리가 250 GTO의 섀시번호를 뒤섞어 100대 이상 생산된 것처럼 FIA 관계자들을 속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적은 생산량이 이 차의 현재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3년 간의 출전기간 동안 거둔 수많은 우승, 아름다운 롱노즈 숏데크 스타일의 디자인, 엄청난 희소성은 자동차 수집가들에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2. 랠리를 위해 태어나다: 란치아 스트라토스 HF
랠리카 하면 떠오르는 차종은 무엇이 있을까? 현역인 폭스바겐 폴로, 현대 i20, 또는 비교적 최근에 활약했던 스바루 임프레자나 시트로엥 사라 같은 차도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랠리카들이 어마어마한 성능경쟁을 벌였던 7~80년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란치아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1972년 출시된 란치아 스트라토스 HF는 파격적인 쐐기형 디자인과 압도적인 성능으로 랠리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란치아 스트라토스는 호몰로게이션 모델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데, 그 이유는 베이스가 되는 양산차 없이 오직 호몰로게이션을 위해서만 개발되고 생산된 모델이기 때문이다. WRC에서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란치아는 풀비아를 대체할 더 강력한 랠리카를 원했고,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쿤타치를 디자인한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에 페라리 246 디노의 V6 엔진을 탑재한 스트라토스 HF를 1971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였다.
오늘날 랠리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미드십 레이아웃에 강력한 엔진, 1톤이 채 되지 않는 초경량 차체, 짧은 휠베이스와 낮은 무게중심으로 말미암아 스트라토스 HF는 1974년부터 76년까지 WRC를 휩쓸었고, 몬테카를로 랠리를 비롯한 많은 랠리 이벤트에서도 우승을 거뒀다. 492대만 생산된 양산모델의 출력은 190마력으로 0-100km/h 가속을 5초 이하로 마쳤으며, 최고속은 232km/h에 달했다. 경기용 엔진의 성능은 전기형 275마력, 후기형은 320마력까지 올라갔으며, 그룹5에 출전하는 레이스카는 터보차저를 탑재해 무려 560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여러가지 이유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토스는 피아트 131 아바르트에 그룹의 랠리카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졌지만, 최근까지도 스트라토스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컨셉트카가 등장하는 등 아직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3. 너무 빨라서 금지된 차: 플리머스 로드런너 슈퍼버드
유럽에 GT 레이스가 있다면, 북미에는 나스카(NASCAR) 레이스가 있다. 우리에게 나스카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강력한 V8 엔진을 얹은 스톡카들의 분초를 다투는 경쟁은 GT 레이스와는 또 다른 설렘을 선사한다. 오늘날 나스카는 대량생산되는 세단이나 픽업트럭의 카울만을 사용하고 있지만, 한 때는 나스카도 양산차들이 접전을 벌이는 시대가 있었다. 70년대 초 나스카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차는 단연 플리머스 슈퍼버드이다.
60년대 말, 대배기량 머슬카들이 출력경쟁을 벌이던 북미에서는 새로운 스타일링이 등장했는데 바로 “에어로 카(Aero Car)”라고 불리는 차들이다. 깎아지른 듯한 앞모습을 가지고 있던 머슬카들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에어로 킷을 통해 공기역학적 성능개선에 나선 것. 1969년 포드 토리노 탤러데가와 닷지 차저 데이토나는 이러한 에어로 카의 전형을 보여주며 나스카에서도 큰 활약을 거두게 된다. 크라이슬러의 계열사였던 플리머스 또한 이러한 경쟁에 동참하여 로드런너를 베이스로 한 호몰로게이션 모델, 슈퍼버드를 선보인다.
V8기통 7.0L급 426 헤미엔진을 얹고 인상적인 쐐기형 에어댐과 거대한 스포일러 윙을 단 슈퍼버드는 공도용 버전이 어렵지 않게 최고속력 260km/h에 도달했으며, 경기용 사양은 320km/h의 최고속력을 냈다. 전설적인 나스카 드라이버 리처드 페티가 탑승한 43번 슈퍼버드는 1970년 시즌 나스카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레이스카가 경기의 재미를 떨어뜨리고 사고 시 큰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듬해인 71년부터 에어로 카들은 금지되어 나스카에서 퇴출된다.
더불어 양산차로썬 지나치게 난해한 디자인 때문에 1,920여 대가 양산된 슈퍼버드의 일반판매 실적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후 나스카가 대량생산되는 차량 중심으로 바뀌면서 슈퍼버드는 최후의 진정한 나스카 호몰로게이션 모델로 기억되고 있다.
4. 랠리와 르망을 모두 휩쓸다: 포르쉐 959
포르쉐 959는 당초 그룹B 랠리를 위한 호몰로게이션 모델로 개발되었으나, 오히려 다른 모터스포츠 이벤트에서 활약한 독특한 차종이다. 일견 단순히 911을 늘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차는, 그러나, 911 GT1 로드카와 카레라 GT, 오늘날의 918 스파이더에 이르는 포르쉐의 플래그쉽 슈퍼카 계보를 처음 쓴 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4륜구동 슈퍼카라고도 할 수 있다.
1981년 그룹B 출전을 위해 개발이 시작된 959의 프로토타입은 “Gruppe B(그루페 B)”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당시 그룹B에서는 거의 출력무제한에 가까운 피튀기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포르쉐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포르쉐는 당대 최첨단 기술력을 총동원해 심혈을 기울여 959를 개발했다. 전자제어식 4륜구동 시스템과 공기역학을 고려한 디자인, 알루미늄과 케블라를 사용한 초경량 차체와 TPMS가 탑재된 마그네슘 합금휠, 2.8L 수평대향형 6기통 트윈터보 엔진의 조합은 959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로 만들어 주었다. 최고출력은 444마력, 최고속력은 314km/h에 달했다.
그런데 완성단계에 이르자, 포르쉐는 959를 그룹B에 출전시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군다나 그룹B는 안전문제를 이유로 198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중단 수순을 밟고 있었다. 대신 포르쉐는 파리-다카르 랠리에 959 프로토타입을 출전시켰고, 1986년 원투피니쉬를 거두었다. 또 같은 해에 포르쉐는 2대의 959를 온로드 레이스용으로 개조하여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 출전시켰는데(포르궤 961), 르망에서도 클래스 우승을 거두며 랠리와 온로드 내구레이스를 동시에 평정하는 기염을 토했다. 오직 283대의 로드카만이 생산되었으며, 959의 등장은 이후 80년대 말~90년대 초 슈퍼카 경쟁의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
5. 검은 카리스마의 DTM 챔피언: 메르세데스-벤츠 190E 2.5-16 Evo II
메르세데스-벤츠는 오늘날 많은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30년 이상의 오랜 시간동안 모터스포츠를 떠나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55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서 300 SLR 레이스카가 관중석에 충돌, 폭발하면서 80여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최악의 참사 이후, 메르세데스-벤츠는 모터스포츠에서 전면 철수한다. 오랫동안 점점 스포츠성을 잃고 보수적이고 늙은 브랜드로 인식되며 위기를 맞이한 메르세데스-벤츠는 80년대에 들어서야 레이스 컴백을 선언하는데, 이 때 DTM(독일 투어링카 챔피언십) 출전을 위해 만들어진 차량이 바로 190E 2.3-16이다.
1982년부터 생산된 베스트셀러 컴팩트 세단이자 C클래스의 전신이기도 한 190E는 컴팩트한 차체와 높은 실용성, 우수한 주행성능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190E를 랠리에 출전시키고자 했으나 4륜구동과 터보차저가 지배한 랠리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 코스워스가 개발한 2.3L 16밸브 엔진과 전용 바디킷을 장착하고 DTM 출전을 준비했다. 190E 2.3-16은 1983년 데뷔하였는데, 이탈리아 나르도 서킷에서 평균속도 247.94km/h로 50,000km를 주행하는 내구테스트를 거쳐 내구성과 퍼포먼스를 두루 인정받았다. 이후 88년에는 배기량이 2.5L로 늘어나며 더욱 성능이 개선되었다.
80년대 말 DTM에서 190E는 BMW M3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두 회사는 더욱 성능을 개선한 에볼루션 모델을 앞다퉈 출시했다. 89년 502대의 Evo 모델 생산에 이어, 90년에는 AMG 파워팩을 장착하여 225마력의 출력을 내고 전용 17인치 휠과 카리스마 넘치는 에어로 킷을 장착한 Evo II가 출시되었다. Evo II 또한 502대 만이 생산되었으며, 그 중 마지막 2대의 은색 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블루블랙 메탈릭 컬러로만 생산되었다. 오늘날에는 적잖은 수가 일본으로 수출되어 경매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