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retro) 디자인이란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적 특징요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말 패션에서 시작된 레트로 열풍은 자동차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다. 2000년 대 중반 이후 많은 회사들이 시대를 풍미했던 명차들을 재해석하여 내놓은 것. 누가 봐도 옛날 그 차를 떠올리게 하는 차부터, 지금까지 회자되는 아이코닉한 디자인 요소를 따온 것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다.
여기에 레트로 디자인을 품은 멋진 자동차 다섯 대를 소개한다. 클래식 모델과 비교하여 21세기의 디자이너들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델들을 어떻게 재해석했는 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1. 레트로 디자인의 선두주자, 포드 머스탱
포드의 대표 스포츠카인 머스탱은 1964년 부터 생산되어 올해로 50번 째 생일을 맞는 장수 모델이다. 60년 대 유례없는 경제호황 속에 더 크고 출력높은 차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젊은 베이비붐 세대가 부담없이 탈 수 있는 “포니카” 장르를 처음으로 개척한 기념비적인 모델이기도 하다. 작고 경쾌한 차체와 강력한 V8 엔진을 얹은 머스탱은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낭만을 상징하는 시대의 야생마였다.
머스탱은 당시 포니카 장르를 개척하면서 경쟁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쉐보레는 머스탱에 대항하기 위해 영화 “트랜스포머”에도 등장했던 카마로를 선보였고, 닷지는 바라쿠다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더 작고 민첩한 챌린저를 출시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인기를 끌었던 머스탱과 포니카들은 70년 대 이후 불어닥친 오일쇼크로 인해 시장이 크게 위축되었고, 이후 세대교체를 거치며 디자인이 바뀌어 과거의 머스탱은 점차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던 2004년, 포드는 1세대 머스탱의 디자인을 되살린 머슬카 스타일의 5세대 머스탱을 선보인다. 동그란 헤드램프, 깎아지른 듯 서있는 라디에이터 그릴, 패스트백 스타일과 3분할 된 테일램프 등 모든 것이 시대를 풍미했던 1세대 머스탱을 떠올리는 디자인이었다. 이 파격적인 레트로 디자인은 머스탱에게 다시 한 번 포니카 열풍을 이끌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5세대 머스탱의 성공에 힘입어 단종되었던 쉐보레 카마로와 닷지 챌린저도 머슬카 디자인을 되살려 부활하였다. 올해는 9년 만에 머스탱 또한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치며 현대적인 터치를 더해 더욱 세련된 6세대로 거듭났다.
2. 귀여운 이탈리아의 국민차, 피아트 500
독일에 폭스바겐 비틀, 프랑스에 시트로엥 2CV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피아트 500이 있다고 할 정도로, 500(이탈리아어로 친퀘첸토)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깜찍한 국민차다. 1936년부터 생산된 경제적인 시티카, 피아트 500 “토폴리노”의 후속으로 개발된 새로운 500은 1957년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2세대 모델이 우리가 흔히 아는 클래식 500에 해당한다. 작은 차체에 500cc의 2기통 엔진을 탑재한 500은 폭스바겐 비틀과 유사한 리어엔진 배치로 실내공간을 확보하였다.
500의 인기는 실로 선풍적이어서 1975년까지 18년의 생산기간 동안 389만 대 이상이 생산되었고 아바르트가 튜닝한 고성능 버전이 출시되는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등장하면서 “베스파” 스쿠터와 함께 이탈리아 도로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피아트 126에 시티카 자리를 넘기고 단종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귀여운 디자인과 실용성, 경제성을 두루 갖춘 500의 부활을 희망해왔다. 그리고 2007년, 마침내 그 꿈이 이뤄졌다.
새로운 500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전륜구동으로 바뀌었지만, 동글동글한 차체와 똘망똘망한 눈매는 클래식 500을 그대로 빼닮았다. 피아트는 이 새로운 시티카를 BMW 그룹의 “미니”처럼 패셔너블하고 개성있는 모델로 키워내고자 다양한 특별에디션을 출시했다. 예전과 같은 아바르트 튜닝버전은 물론 같은 그룹에 속해있는 페라리 에디션, 명품브랜드 구찌와의 콜라보레이션 등을 선보이며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 기술의 한계를 기술의 혁신으로, 포르쉐 911 타르가
포르쉐의 심장과도 같은 라인업, 911에는 2가지 오픈탑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반적인 컨버터블 모델에 해당하는 911 카브리올레,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에게는 좀처럼 익숙치 않은 911 타르가이다. 타르가란, 과거 카브리올레 모델의 기술적 한계로 지적되었던 전복 시 안전성 부족, 강성저하, 공기저항 증가 등을 해결하면서도 오픈에어링을 즐길 수 있도록 A필러와 B필러 사이의 루프만 탈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오픈탑을 의미한다. 911 타르가는 1982년 카브리올레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일한 오픈탑 모델로써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컨버터블의 안전성과 강성이 확보되면서 타르가 탑의 수요는 크게 줄었다.
수냉식 엔진 세대로 불리우는 이전세대의 996, 997 모델에서도 타르가는 존재했으나, 그 형태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외관 상 일반 쿠페와 동일하면서 글래스 루프가 개방되는, 이를테면 파노라마 썬루프와 비슷한 형태에 불과했던 것. 그러나 포르쉐는 새로운 991 타르가를 출시하면서 과거 911 타르가를 상징했던 은색 B필러와 C필러 없는 버블 형태의 리어글래스를 부활시켰다. 물론, 시대가 바뀐 만큼 전자동으로 개폐된다.
거대한 리어글래스가 열리고 B필러가 정교하게 나뉘어지면서 타르가 탑이 전동식으로 수납되는 모습은 일반 카브리올레에서는 볼 수 없는 911 타르가만의 전매특허이다. 더불어 카브리올레에 비해 10% 이상 높은 강성과 더 낮은 공기저항계수는 더빠르고 안전한 오픈에어링을 즐기도록 도와준다. 4륜구동으로만 출시되는 타르가 모델은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을 탑재하여 350마력(S는 400마력)의 짜릿한 출력을 선사한다.
4. 돌아온 정통 오프로더, 토요타 FJ 크루저
토요타는 대중차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랜드크루저와 같은 오프로더도 오랫동안 생산해온 만큼 오프로드형 SUV에도 일가견이 있는 회사다. 랜드크루저의 역사는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미군 납품을 위해 개발된 토요타 “지프 BJ”가 그 전신이다. 이후 세대교체를 거치며 만들어진 랜드크루저 FJ40이 1960년 출시되면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동그란 헤드램프와 독특한 라디에이터 그릴이 지프와 차별화되는 FJ40은 1984년까지 생산되었다.
여전히 FJ40의 동호회가 활발히 활동할 정도로 랜드크루저 FJ40은 토요타에게는 역사적인 성공작 중 하나로 기억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토요타는 단종된 지 20여 년만에 2003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최신 랜드크루저를 기반으로 한 레트로 오프로더, FJ 크루저 컨셉트카를 선보인다. 컨셉트카는 좋은 호응을 얻어 2006년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하였다. 지난 해 말에는 우리나라에도 출시되어 국내에서도 정식수입모델을 만날 수 있다.
FJ 크루저는 독특한 수어사이드 도어와 클래식한 디자인의 램프, 트렁크 해치에 달린 스페어 타이어 등 FJ40을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 요소가 가득하다. 그러나 겉멋만 든 패션 SUV가 아닌, 명실상부한 정통 오프로더로써의 험지주파 실력도 수준급이다. 높은 지상고와 32인치 타이어, 짧은 오버행은 FJ 크루저에게 경쟁차종인 지프 랭글러나 랜드로버 디펜더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오프로드 성능을 제공한다. 주력시장인 북미에서는 애프터마켓과 동호회에서 선대 FJ40과 마찬가지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5. 실버 애로우의 부활, 메르세데스-벤츠 SLS AMG
세계 최고의 명차 브랜드로 일컬어지는 메르세데스-벤츠는 그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쿠페와 스포츠카 라인업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로드스터 라인업인 SL은 긴 역사를 자랑한다. 레이스를 위해 개발된 300SL은 1954년부터 일반도로용 양산모델을 선보였는데, 레이스카에서 유래한 만큼 독특한 튜브형 섀시를 그대로 채용하였다. 모델명의 SL은 독일어로 “Super Leicht(Super Light, 초경량)”를 의미한다.
300SL은 갈매기 날개처럼 열린다 하여 이름붙여진 걸윙 도어를 장착하였는데, 이는 레이스카의 섀시를 유용하는 과정에서 옆면을 통과하는 바디 프레임을 살려 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타고 내리는 것은 불편해졌으나, 뛰어난 차체 강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여기에 세계 최초의 가솔린 직분사 직렬6기통 엔진을 탑재해 215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며 당대의 가장 빠른 양산차로 등극했다. 르망 24시, 뉘르부르크링 그랑프리, 밀레밀리아 랠리 등 수많은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둔 300SL은 메르세데스-벤츠 “실버 애로우”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300SL의 활약 이후 메르세데스-벤츠는 SL이라는 이름의 근사한 쿠페와 로드스터를 꾸준히 만들어 왔지만, 환상적인 걸윙 도어가 부활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SLR 맥라렌에 이어 선보인 SLS AMG는 걸윙도어를 장착하고 전설적인 300SL의 오마주 디자인을 선보이며 메르세데스-벤츠 라인업의 최정상에 등극하였다. 프런트 미드십 배치의 6.2L V8 엔진은 571마력, 66.3kg.m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100km/h에 이르는 데에는 3.8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걸윙 도어는 썩 편리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SLS AMG의 세련된 스타일링과 뛰어난 퍼포먼스는 실버 애로우의 빛나는 명성에 걸맞는 품격을 완성한다.
SLS AMG는 지난 6월 파이널 에디션을 끝으로 단종되고 AMG GT에게 메르세데스-벤츠의 플래그십 GT카 자리를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