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불꽃튀는 리그가 벌어지는 슈퍼카 업계에서 페라리의 라이벌을 꼽으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람보르기니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람보르기니는 로드카 시장에서는 페라리의 적수가 될 지언정, 모터스포츠에서는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모터스포츠, 특히 F1에서 페라리와 가장 오랫동안 맞붙어온 것은 영국의 레이싱 팀인 맥라렌이다. 페라리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랫동안 F1에 출전중인 맥라렌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브리티쉬 슈퍼카를 선보이며 로드카 시장에도 도전하고 있다.
모터스포츠에서 시작된 역사
1963년, 당시 영국의 “쿠퍼” 팀에서 레이서 겸 엔지니어로 활동중이었던 뉴질랜드 출신의 브루스 맥라렌은 팀의 오너였던 찰스 쿠퍼와의 의견차이를 계기로 자신만의 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팀 동료였던 티미 메이어와 함께 “브루스 맥라렌 레이싱 팀”을 창설하고 이듬해부터 각종 모터스포츠에 출전한다.
196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F1에 출전하여 출전 2년 만인 1968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쥐게 된다. 1970년 굿우드 서킷에서 머신 테스트 도중 브루스 맥라렌이 사고로 사망하지만, 이후에도 맥라렌 레이싱 팀은 다양한 혁신적 설계와 팀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많은 우승을 거두게 된다. 에머슨 피티팔디, 니키 라우다, 알랭 프로스트와 전설적인 아얄톤 세나 등 F1 역사에 길이 남을 여러 레이서들이 맥라렌 팀을 거쳐갔으며, F1 뿐만 아니라 인디500이나 캔앰 레이스와 같은 북미권 모터스포츠에도 꾸준히 출전하였다.
1995년에는 혼다 이후 마땅한 엔진 공급자를 구하지 못하던 맥라렌이 메르세데스-벤츠와 엔진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맥라렌 메르세데스 동맹이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영국적인 엔지니어링 색깔을 가진 맥라렌의 역사는 그 뿌리를 모터스포츠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라렌 F1 :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의 타이틀을 거머쥐다
맥라렌이 오랫동안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면서, 한 편으로는 모터스포츠 기술이 접목된 슈퍼카에 대한 열망도 키우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결과물이 바로 1992년에 공개된 맥라렌 F1이다. 천재적인 F1 설계자인 고든 머레이는 198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레이스카와 같이 정중앙에 운전석이 위치한 3인승 슈퍼카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당시 팀 오너였던 론 데니스에게 보여주었다. 그 한 장의 스케치에서 궁극의 로드카 개발이 시작되었다.
맥라렌 F1의 가장 큰 특징은 3인승 설계이다. 운전석이 정중앙에 위치하고, 동승자를 위한 2개의 좌석은 양 옆 뒷쪽에 위치하고 있다.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로썬 양산차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카본 파이버와 알루미늄, 마그네슘, 케블라 등 경량 고강성 소재를 적극 활용하여 공차중량은 1,149kg에 불과했다. 최초에는 혼다의 엔진을 사용하려 했으나, 혼다의 엔진공급 거부로 BMW의 6.1L V12 엔진이 미드십으로 탑재되었고, 최고출력은 627마력에 달했다. 변속기는 카본 재질의 6속 수동변속기가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맥라렌 F1을 빛나게 하는건 당대 최고속 양산차라는 타이틀이다. 맥라렌 F1의 최고속도는 386km/h에 달했고, 시속 60마일(약 97km/h)에 도달하는 데에는 3.2초면 충분했다. 1998년 기록수립 후 쾨닉세그 CCR이 2005년 기록을 깰 때까지 맥라렌 F1은 무려 7년 간 세계 최정상에 서있었다. 오늘날에는 부가티 베이론이 출시되면서 400km/h대의 슈퍼카들도 심심찮게 출시되고 있지만, 터보차저나 슈퍼차저가 달린 새로운 도전자들과 달리 맥라렌 F1은 자연흡기 엔진과 경량 차체, 공기역학적 설계로 이뤄낸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맥라렌 F1은 1995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경기용 사양인 GTR 버전으로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후에도 FIA GT를 비롯해 많은 국제 레이스를 휩쓸었다. LM, GT 등 고성능 모델과 서킷전용의 GTR을 포함해 오직 106대 만이 생산되었다.
SLR 맥라렌 : 메르세데스-벤츠와의 합작품
앞서 설명했듯 맥라렌과 메르세데스-벤츠는 F1 레이스에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99년 당시 맥라렌 그룹의 대주주였던 다임러 크라이슬러 그룹은 맥라렌에게 메르세데스-벤츠의 최상급 GT카 개발을 위해 바디 설계와 생산을 맡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2003년 탄생한 것이 바로 전설적인 레이스카, 300SLR의 오마주인 SLR 맥라렌이다.
SLR 맥라렌은 메르세데스-벤츠의 5.4L V8 슈퍼차저 엔진을 얹고 626마력을 내는 슈퍼카로, 당대의 페라리 599GTB 피오라노나 애스턴마틴 V12 DBS를 경쟁상대로 지목했다. 맥라렌이 설계한 바디는 카본 파이버를 사용해 중량을 최대한 억제했고, 가변식 스포일러는 속도에 따라 다운포스를 조절하는 기능을 했다. 더불어 섭씨 1,200도까지 버틸 수 있는 카본 세라믹 디스크 브레이크와 AMG가 개발한 5속 자동변속기 등 첨단 사양을 탑재해 퍼포먼스적 향상을 꾀했다.
메르세데스-벤츠 SLR 맥라렌은 영국 워킹에 위치한 맥라렌 공장에서 생산되었으며 이후 로드스터 라인업 추가와 더불어 722 에디션, 스털링 모스 에디션 등 고성능 버전을 내놓았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당초 SLR 맥라렌의 후속과 아랫급 슈퍼카인 SLS 등 자사의 슈퍼카 라인업을 맥라렌과 함께 만드는 데에 합의하였으나, SLS AMG를 독자개발하면서 사실상 협력관계는 마무리되었다.
맥라렌 12C, P1 : 돌아온 브리티쉬 슈퍼카의 진수
맥라렌은 1998년 전설적인 F1 모델을 단종시킨 후 SLR 맥라렌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로드카를 개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2011년, 페라리 458 이탈리아와 경쟁을 선포하며 13년 만에 맥라렌 뱃지를 단 로드카, MP4-12C가 출시되었다. 레이스카에서 따온 모노셀 카본 파이버 튜브를 기반으로 한 초경량 섀시는 공차중량을 1,434kg로 제한시켰고, 독자개발한 3.8L V8 트윈터보 엔진은 600마력의 출력을 내며 7속 듀얼클러치 변속기에 맞물린다. 출시 이듬해에는 길고 복잡한 이름이 12C로 간소화되었다.
최고속이 333km/h에 이르는 이 새로운 슈퍼카에 이어, 맥라렌은 2013년부터 한정판 플래그십 슈퍼카인 P1을 전격 양산하기 시작했다. 737마력을 내는 3.8L 엔진과 더불어 전기모터를 탑재, 통합출력은 무려 916마력에 이르며 부가티 베이론, 라페라리, 포르쉐 918과 같은 최상급 슈퍼카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P1 역시 모터스포츠 기술을 대거 적용하여 F1 레이스카의 KERS와 유사한 전기식 부스터(IPAS)와 전동식 스포일러가 다운포스를 조절하는 DRS같은 첨단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이 가미된 브리티쉬 슈퍼카를 꿈꾸는 맥라렌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해에는 12C의 후속인 650S를 선보였고, 향후 2020년 까지 가지치기 모델을 포함하여 최대 10종 이상의 신모델을 공개한다는 것이 맥라렌의 목표이다. 이처럼 공격적인 맥라렌의 신차개발로 페라리, 람보르기니와 포르쉐 등 오랫동안 양산 슈퍼카를 만들어온 전통의 강호들은 또 하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