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단인 XJ, XF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스포츠카 브랜드’ 재규어의 명맥을 잇는 퓨어 재규어가 바로 F-TYPE이다. 이전의 XK와도 다르다. 이름을 F-TYPE으로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911과 둘 중에서 고르라면 문제가 심각해지겠지만 911을 충분히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F-TYPE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911을 잊게 만드는 재규어의 야성에 푹 빠져 보시라.
지난 4월에 경주에서 있었던 재규어 랜드로버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에서 F-TYPE을 시승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아예 본격적으로 시승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그 때는 비도 오고, 시승 시간도 짧아서 제대로 F-TYPE을 알아 볼 시간이 모자랐었다.
그런데 시승차를 받은 이번에도 비가 내린다. 개인적으로 오픈카 시승 때는 비가 오는 징크스가 좀 있다.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시승을 좀 했는데, 다행히 그 다음날은 날씨가 좋아져서 제대로 F-TYPE을 즐길 수 있게 됐다.
F-TYPE은 알파벳 순서대로 E-TYPE의 후속 모델이다. 그 이전에는 C와 D-TYPE이 있었다. C-TYPE으로 르망에 처음 출전했고, D-TYPE으로 1955, 56, 57년 3회 연속 르망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1961년에 나온 E-TYPE은 도로용 스포츠카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큰 인기를 얻었다. E-TYPE은 자동차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아름다운 스포츠카였다.
그런데 E-TYPE이 단종 된 것이 1975년인데 그 이후 오랫동안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하다가 지난 2013년에 이르러서야 그 이름을 이어갈 F-TYPE이 세상이 등장한 것이다. 그 동안 럭셔리 쿠페 XJS도 있었고, 재규어스러운 정통 쿠페 XK도 있었지만 이제서야 E-TYPE의 맥을 잇는 모델이 나온 것이다.
디자인은 역시 이안 칼럼이 주도했고, 2011년 선 보인 C-X16 컨셉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컨셉트카는 쿠페였는데, 양산형에서는 로드스터가 먼저 선보인 점이 큰 차이였다.
F-TYPE은 롱노즈 숏데크 타입의 2인승 로드스터다. 그런데 E-TYPE의 대를 잇는다고는 하지만 차체 비례 면에서 E-TYPE만큼 길지는 않다. 좀 더 현대적으로 다듬었다고 봐야 한다.
크기는 4,470x 1,923x 1,319mm에 휠베이스 2,622mm다. BMW Z4가 4,244×1,790×1,284mm에 휠베이스 2,496mm, 박스터 S가 4,374×1,801×1,282mm에 휠베이스 2,475mm로 컴팩트 로드스터인 이들 모델보다는 좀 더 크고, 포르쉐 911 카레라S 카브리올레의 4,491×1,808×1,292mm에 휠베이스 2,450mm보다도 크다. 이들보다 한 치수 큰 페라리 458스파이더의 4,527×1,937×1,211mm 2,650mm와 휠베이스는 비슷하고 크기는 조금 작다. 포지셔닝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
같은 브랜드 내의 재규어 XK 컨버터블은 이들보다 한 사이즈 더 큰 4,780×1,890×1,305mm에 휠베이스 2,750mm다.
F-TYPE 역시 재규어의 고급모델들처럼 알루미늄 모노코크 바디에 에폭시 접합과 리벳 본딩으로 차체를 제작해 가볍고 견고하다. 로드스터이면서도 강성에서 세단이나 쿠페에 결코 모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F-TYPE의 생김새는 옆에서 봤을 때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늘씬한 차체와 특히 날렵하게 가늘어지는 데크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노즈가 좀 더 길었다면 E-TYPE의 느낌이 더 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실내는 지극히 현대적이면서 고급스럽고, 스포츠 느낌이 물씬하다. 그런데 실내로 들어가는 과정이 더 인상적이다.
도어 락을 풀면 부채가 펴지듯이 숨어 있던 손잡이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손잡이는 튀어 나온 부분의 아래쪽에 홈이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당겨진다.
시트 포지션은 외모에 비해 심하게 낮은 편은 아니다. 편안하다. 시트는 헤드레스트 일체형인데 옆구리를 잘 잡아 줄 것이 눈으로도 보인다. 아쉬운 점은 냉방기능이 없다는 것.
화려한 스타일에 비해 다소 심심하리 만치 동그란 스티어링과 그 너머 계기판도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스티어링 휠 뒷면에 부착되어 있는 시프트 패들 색상이 금빛이 도는 오랜지색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실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센터페시아 상단에 자리한 팝업식 액티브 에어 벤트다. 에어컨을 끄면 스르르 내려가 평평한 데시보드가 되는데 에어컨을 켜면 사각형의 에어컨 공기 배출구가 솟아 오른다. 디자인이나 움직임이 일본 SF만화에 나오는 우주선의 엔진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아래는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다. 전자식 에어컨 다이얼도 멋지고, 그 아래 토글 스위치들도 멋지다.
특히 재규어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체커기가 그려진 트랙 모드를 선택하는 스위치가 가장 멋지다. 그 윗쪽의 엔진 스타트/스톱 버튼과 앞서 말한 시프트 패들과 함께 금빛이 도는 오랜지 색 포인트가 시선을 압도한다. 재규어에서는 ‘이그니스(Ignis, 불꽃) 컬러’라고 부른다.
기어 레버는 전자식인데 디자인이 멋진 것에 비해 조작 편의성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조작해도 되는 기능에도 버튼을 눌러야 되도록 해 놨다. 전자식 기어 레버의 작동 표준은 역시 BMW다. 반면 레버를 앞으로 밀면 시프트 다운, 뒤로 당기면 시프트 업이 되는 방식은 BMW의 방식을 따랐다. 스포츠카에는 이 방식이 확실히 잘 어울린다.
기어 레버의 디자인이 4각 기둥 형태다 보니 레버를 손으로 잡을 때 감싸지는 느낌이 들지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BMW의 것은 좀 넙적하게 생겼어도 손으로 잡으면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다. 결국 이러나 저러나 전자식 기어레버의 표준은 BMW다.
오디오는 메리디안 시스템인데 음질이 충분히 좋다. 블루투스로 듣는 음악도 훌륭하다. USB와 AUX, CD 플레이어는 센터 콘솔 박스 안쪽에 자리했다. 오픈카에는 음질 좋은 오디오가 꼭 있어줘야 된다. 해가 지는 초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지붕을 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기분은 오픈카의 백미다.
실내에서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는 주행 중 100km/h가 넘어 리어 스포일러가 올라오면 리어 뷰 미러를 통해서 스포일러 중앙의 재규어 엠블렘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이다. 시야를 조금 가리긴 하지만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에 도취된 나르시스처럼 자꾸 재규어를 쳐다 보게 된다.
F-TYPE이 하드탑 컨버터블 대신 전통적인 소프트탑을 적용한 것은 무척 반갑다. 요즘 소프트탑은 매우 견고하고, 밀폐성도 좋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가벼운 만큼 운동성능에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50km/h까지는 주행 중에도 열고 닫을 수 있으며, 불과 12초 만에 개폐가 가능한 점은 큰 매력이다. 하드탑 컨버터블은 대부분 정차한 상태에서 탑을 열고 닫아야 하고 작동 시간도 오래 걸린다.
반면 탑을 열었을 때 뒤에서 들이치는 바람을 막아주는 윈드 디플렉터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F-TYPE은 엔진에 따라 3가지 트림으로 소개됐다. 그 중 시승한 차는 최상위 트림인 V8 S로 5.0 수퍼차저 V8엔진이 최고출력 495마력/6,500rpm, 최대토크 63.8kg.m/2,500-5,500rpm의 강력한 성능을 뿜어낸다. 변속기는 자동 8단이고, 0~100km/h 가속에는 4.3초가 걸리고, 최고속도는 300km/h다.
F-TYPE의 운동성능은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그 동안 타 봤던 재규어의 많은 고성능 모델을 감안할 때 대충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했던 것에 비해 월등히 높은 성능을 보여줬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속 이상의 영역에서의 폭발적인 가속력과 뛰어난 코너링 실력이다.
0~100km/h 가속 4.3초는 495마력의 출력을 감안할 때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든다. 3초 후반 정도는 끊어줘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어찌 보면 재규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XF-R을 비롯한 XF-RS, XK-RS 등도 510마력에 4.9초, 550마력에 4.6초, 550마력에 4.4초 등으로 흔히 말하는 제로백은 마력 대비 그다지 빠르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중속 이상으로 올라가면 가속력은 동급 다른 스포츠카 대비 더욱 강력하다. 롤링 가속에서 동급 최강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200km/h를 넘어서도 최고속도 영역까지 무척 빠르게 가속할 뿐 아니라 도로 여건만 되면 최고속도를 넘어설 것 같은 기세가 매섭다.
F-TYPE은 코너링 실력도 발군이다. 앞뒤 255/35 R20, 295/30 R20 사이즈의 피렐리 P-제로 타이어의 접지력이 제대로 발휘되면서 노면을 잡고 달리는 느낌이 탁월하고, 코너를 돌아나가는 속도 역시 무척 높다. 흔히 비교의 대상이 되는 리어 엔진 포르쉐 911의 코너링을 떠 올릴 정도로 코너에서의 접지력이 뛰어나다. 서킷에 들어간다면 정말 제대로 F-TYPE을 즐길 수 있겠다.
V8 S 모델에는 코너링 성능을 향상시켜 주는 전자식 액티브 디퍼렌셜(EAD: Electronic Active Differential)이 장착되어 있어 타이어에서 슬립이 일어날 경우 DSC(Dynamic Stability Control)와 함께 보다 안정적으로 차체를 제어해 준다. 재규어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랙 DSC’를 작동시키면 약간의 오버스티어를 허용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코너링을 즐길 수도 있다.
V8 S 모델이 5.0 수퍼차저 엔진을 얹고도 최고출력이 495마력인 것은 어찌 보면 조금은 소심한 세팅이다. 충분히 550마력 이상을 뽑아 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S’ 위로 R과 RS를 염두에 둔 세팅이다. 컨버터블이 먼저 출시된 후 지난 부산 모터쇼를 통해서 선보인 F-TYPE 쿠페는 R 모델에 550마력 엔진을 얹었다.
변속기도 비교적 만족스럽다. 다운 시프트 시 회전수를 맞춰주는 실력이 뛰어나고 전체적인 반응도 무척 빠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기어 레버의 수동조작 방향이 앞으로 밀면 시프트 다운(-)인 것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실제로 와인딩에서는 기어 레버 보다는 시프트 패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시프트 패들은 조작감도 좋은 편이다.
재규어 F-TYPE의 매력으로 중속 이상에서의 탁월한 가속력과 뛰어난 코너링 실력 외에 하나를 더 들자면 배기 사운드를 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배기 사운드를 많이 키운 데다 액티브 이그조스트 시스템이 달려 있어 시스템을 켜면 배기 사운드는 더욱 자극적으로 변한다. 특히 기어를 바꿀 때나 가속 후 엑셀에서 발을 땔 때 배기 쪽에서 터져 나오는 ‘빠바방’하는 폭발음은 자극을 극도로 높여 준다. 산길이나 터널에서 배기 파이프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오면 그 울림이 대단하다.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배기 사운드가 워낙 자극적이다 보니 엔진 사운드는 크게 다가오지 않는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재규어 F-TYPE은 우선 이름부터 마음에 든다. E-TYPE의 화려했던 영광이 고스란히 이어져 온 느낌이다. 가장 강력한 V8 S 모델은 출력 대비 살짝 부족하다 싶은 초반 가속력 대신 중속 이상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속력이 탁월한 매력이다. (물론 0~100km/h 가속 4.3초를 빠르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뛰어난 접지력이 만들어내는 코너링 실력도 기대 이상을 넘어 매우 뛰어나다. 자극적인 배기 사운드는 개인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나뉠 수도 있겠지만 그 매력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디자인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지붕을 열고 햇살을 맞으며 유유히 달리는 것도 즐겁고, 바람을 가르며 재규어의 야성이 폭발하는 가속력과 핸들링을 즐기는 것도 좋다. 지붕을 연다는 것이 단지 젊은 날의 허영이 아닌 나이가 들 수록 더 좋아지는 오픈카의 여유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