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로서 550마력을 품고, 0~100km/h 가속을 4.5초에 끝내는 포르쉐 카이엔 터보 S는 다소 비현실적인 세계로 다가간 모델이다. 어차피 스포츠카가 아니기 때문에 최고속도인 283km/h에서의 거동이 어떠하고, 초고속 코너링 성능은 어떠한지 등은 (일부 열혈 매니아들을 제외하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단지 지금까지 가장 강력했던 카이엔 터보보다 더 강력한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 뿐이다.
달리기 성능이 정말 중요하다면 911을 사면 된다. SUV인 카이엔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911의 달리기 실력을 따라 갈 수는 없다. 그리고 작은 스포츠카는 싫고, 꼭 덩치 큰 SUV 중에서 달리기 실력이 좋은 놈을 고르고 싶다면 카이엔 GTS가 더 화끈할 수도 있다. 비록 가속력과 최고속도에서는 달리지만 카이엔 중에서 가장 포르쉐다운 모델이 카이엔 GTS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SUV에게 빠른 가속력과 최고속도가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동안 카이엔 터보로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극소수이지만 500마력의 카이엔 터보로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빠른 카이엔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을 위해 카이엔 터보 S가 태어났다?
이 명제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맞지 않을 수 있다. 카이엔 터보 S를 구입하는 이들 중에 그 조금의 ‘더 빠름’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많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이엔 터보 S가 550마력이어서, 0~100km/h 가속이 4.5초여서, 최고속도가 283km/h여서 구입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카이엔 터보 S가 최고의 포르쉐 SUV이기 때문에 구입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카이엔 터보 S다.
이번에 카이엔 터보 S를 시승하면서 이 차가 얼마나 빠른지, 고속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달리는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동차 전문기자로서 직무유기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포르쉐는 자신들이 밝힌 제원에 책임을 져왔고, 달리기 실력에서 세계 최고임을 한 번도 의심하게 한 적이 없으니 굳이 직접 달려서 확인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포르쉐 최고의 SUV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차를 구입했을 그 어떤 고객의 입장에서 카이엔 터보 S를 한번 바라보고 싶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화려한 실내다. 파나메라에서 시작된 인테리어 디자인 패턴이 파나메라를 거쳐 이제는 911과 박스터, 카이맨까지 이어졌다. 카이엔 터보 S는 파나메라에 비해 버튼의 숫자는 적지만 버튼이 더 크고 기어레버 아래의 차고조절과 4륜 구동 조절 장치, 그리고 그 좌우의 손잡이까지 더해져 더 화려한 느낌이 든다. 변속기가 PDK가 아닌 자동 8단이어서 변속기 레버 디자인은 다른 모델들과 좀 다르다.
포르쉐는 오너의 취향에 따라 수 많은 옵션들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실내를 다양하게 꾸밀 수 있는데, 데시보드를 포함해 많은 부분을 가죽으로 덮는 정도는 이제는 흔한 선택이다. 시승차에는 카본 패널이 일부 적용된 것이 눈에 띄고 알칸타라나 우드, 기타 화려한 색상의 가죽이나 패널의 적용은 없다. 차가 흰색인 것에 맞춰서 키도 흰색인 것이 특이하다.
장비들 중에서는 버메스터 오디오와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돋보인다. 버메스터 오디오는 보스 오디오보다 더 고급사양으로 16개의 스피커를 통해 1,000와트의 출력을 뿜어내며, 강렬한 비트의 음악에 잘 어울린다. 블루투스로 오디오 스트리밍도 지원하지만 사운드를 생각하면 CD가 가장 뛰어난 음질을 제공하고, 아쉬운 대로 USB도 블루투스 보다는 낫다. 한글을 지원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차간 거리를 유지하며 정속으로 달릴 수 있고, 정지할 때까지 작동하므로 장거리 여행에는 최고의 편의 장비다. 스티어링 칼럼 좌측의 레버로 조작하는데, 기왕이면 스티어링 휠로 조작 버튼이 옮겨 오면 더 좋겠다.
외관에서 카이엔 터보 S가 터보와 구분되는 점은 많지 않다. 앞모습에서는 주변을 검게 처리한 블랙 베젤 헤드램프 정도가 눈에 띈다. 뒷모습에 가서야 비로소 엠블렘에서 카이엔 뒤에 붙은 S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메이커들이 모델을 구분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 머플러 디자인인데 터보는 원형으로 두 개인데, 터보 S는 사각형 두 개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21인치 초대형 911 터보 II 알로이 휠 속으로 보이는 노란색 캘리퍼는 PCCB의 상징이지만, PCCB는 터보와 터보 S에 모두 옵션이므로 차이점으로 볼 수는 없다.
요즘 SUV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카이엔 터보 S도 도심에서 활동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라이프 스타일에 카이엔 터보 S는 완벽하게 적응한다. 우아한 익스테리어 디자인이 도심의 빌딩과 조화를 이루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도시의 화려한 삶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SUV인 만큼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도 카이엔 터보 S의 존재는 돋보인다. 지상고를 높일 수 있고, 험로를 주파할 수 있는 강력한 4륜 구동 시스템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돌 밭으로 들어가지 전에 신발은 반드시 갈아 신어야 비싼 신발이 상하는 일은 막을 수 있겠다.
포르쉐 SUV 최상의 존재인 카이엔 터보 S를 소유한 이들이 쉽게 카이엔 터보와 구별되기를 원할까,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게 혼자만 그 가치를 누리길 원할까? 포르쉐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듯하다, 카이엔 터보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일반인들이 봤을 땐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로.
가치는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아도 빛나는 법이다. 운전석에 앉아서 탁 트인 시야 속으로 달려나갈 때 조금 더 빠르지 않아도 내가 이 시대 최고의 SUV에 앉아 있다는 자부심은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움직임은 더 여유롭고 우아해지게 된다. 더 큰 힘을 가졌다고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군자의 여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