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터널을 통과해 영국을 다녀오고, 북유럽의 정점 노르웨이 아틀란틱 로드 미션도 완수한 후 드디어 독일 땅에 들어왔지만 이번 북유럽 투어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일정이 남았다. 자동차 전문 기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아직까지 한 번도 달려 보지 못한 뉘르부르크링을 처음으로 달려 보는 일이다. 뉘르부르크 링은 이미 이번 여정 초입에 독일을 떠나 런던으로 가던 날 잠깐 들르긴 했지만 그 날은 제대로 링을 보지도, 달려보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링을 구경하고 또 직접 달려 볼 작정이다.
함부르크에서 뉘르부르크링까지는 500여 km 거리다. 아침으로는 여정의 대미답게 한국식(?) 식단으로 아껴 두었던 햇반과 나가사끼 짬뽕 컵라면을 먹고 서둘러 출발했다.
거리가 500km가 넘긴 하지만 아우토반을 달리면 한국에서 500km를 달리는 것보다는 휠씬 일찍 주파가 가능하다.
뉘르부르크 링에는 오후 1시경 도착했다. 우선 링 인포메이션 빌딩을 둘러봤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 건물로 쇼핑 몰과 주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최근에 오픈한 롤러코스트도 건물을 관통해서 설치돼 있다. 패독과 서킷을 둘러볼 생각은 없어서 이 건물만 둘러보다 보니 서킷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여기 저기 거닐다 주차장에서 반가운 자동차를 만났다. 올드 비틀인데 흰색 차체에 53번 번호를 붙여서 꾸민 차다. 미국 드라마를 통해 큰 인기를 얻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허비’를 흉내 낸 것이다. 허비는 스스로 생각하고 달릴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놀랄 만한 신기한 재주들을 갖고 있어 주인공을 레이스에서 우승하게 만들어 주었던 동심 속의 자동차였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이 허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었다.
뉘르부르크링은 1927년 지어져 F1을 비롯한 다양한 경주들이 열렸는데, 1976년 니키 라우다가 대형 사고를 당한 후 오랫동안 F1은 열리지 않다가 현재는 호켄하임 링과 번갈아 가며 독일 F1 그랑프리를 열고 있다. 원래 뉘르부르크링은 4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F1 그랑프리등 국제 경기를 여는 5.15km의 남쪽 GP-Strecke와 20.81km 길이의 북쪽 Nordschleife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둘러 본 곳은 뉘르부르크링 GP-Strecke의 인포메이션 건물이었고, 사실 뉘르부르크링은 그린 헬로 불리는 북쪽 코스, 노르트슐라이페가 매니아들에게는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는 마치 시골 산길을 달리는 것처럼 블라인드 코너를 포함한 154개의 턴이 있고, 최대 고저차가 300m에 이를 정도로 지구상 가장 험난한 서킷이다. 때문에 수 많은 자동차 메이커들이 신차 개발을 위한 테스트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의 랩 타임은 그대로 그 자동차의 성능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많은 수퍼카들이 앞 다투어 노르트슐라이페 랩타임에 도전해서 자신의 기록을 자랑 삼아 발표하고 있다.
동행한 한 기자가 이미 수 차례 뉘르부르크링을 다녀간 터라 잘 안내해 준 덕분에 쉽게 뉘르부르크링 이곳 저곳을 둘러 볼 수 있었다.
평일 노르트슐라이페 주행은 낮 동안 메이커들의 테스트 주행이 있을 경우 오후 5시부터 일반인 주행이 가능하다. 링 메인 건물을 둘러 본 후 노르트슐라이페 입구에 도착했지만 서킷 주행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한산했다.
그래서 한 기자가 발굴해 놓은 스파이샷 명당(?)을 먼저 둘러보러 갔다. 서킷 옆을 따라 난 도로를 잠시 달리다 옆길로 빠지자 산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왔다. 조금 따라 올라가는데 트랙터와 트럭이 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고 있어 더 이상 차로는 올라갈 수 없어서 차를 길 가에 세워두고 걸어서 본격적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오른쪽에 철조망이 나타났고 그 너머에 링이 보였고, 테스트 중인 차량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간다. 트랙 바닥 곳곳에 수 없이 많이 표시된 다양한 사인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 곳에서 일어 났었는지 짐작케 준다.
길을 따라 5분 정도 더 들어가자 말 그래도 명당에 도착했다. 수 많은 스파이샷에서 봤던 바로 그 장소다. 대부분 위장막을 쓰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테스트 주행 중인 신차들이 코너를 돌아나가는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고, 또 사진도 찍을 수 있다. 펜스 바로 옆까지 내려 갈 수 있도록 문도 열려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도 여러 대의 신차들이 위장막을 쓰고 테스트 중이었는데, 시선을 끈 모델은 포르쉐 911 GT2,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스포츠 RS, 그리고 람보르기니 가야르도의 후속 모델인 카브레라 등이었다.
신나게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있는데, 저 너머 코너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오더니 우리가 있는 포인트에서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첫 눈에 봐도 전문 파파라치처럼 보였다. 물어보니 그 중 한 명은 스웨덴 출신으로 2주에 한 번씩은 이곳에 와서 스파이샷을 찍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필요하면 우리에게도 스파이샷을 제공하겠다며 명함을 건넨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위장막을 쓴 차들이 무슨 모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포르쉐 911도 GT3인가 했는데 GT2라고 알려 줬고, 테스트 주행 차가 아닌 레이서 연습 차량은 차 뒤에 ‘L’자를 붙이고 다닌다는 것도 알려 줬다. 그날은 최근 뉘르부르크링에 테스트 센터를 연 현대에서도 연습 주행을 하고 있었는데, 제네시스 쿠페가 뒤에 L자를 붙이고 달리고 있었다.
정신 없이 구경하다 주행 시간도 가까워져 다시 노르트슐라이페 정문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서킷 주행용 렌트카를 빌려 주는 곳도 둘러 봤는데, 스즈키 스위프트가 대부분이었고, 가끔 고성능 차들도 보이곤 했다.
정문에 도착하자 아까 들렀을 때와는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새 수 많은 차들이 뉘르부르크링을 달리려고 모여든 것이다. BMW M3, 폭스바겐 골프 GTI 등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포르쉐들과 닛산 GTR,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등 수퍼카, 그리고 여러 대의 토요타 86도 보였다.
생애 처음으로 뉘르부르크링을 달리게 되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4바퀴를 달려 보고 싶었지만 첫 주행에서 4랩은 무척 어렵다는 한 기자의 조언에 따라 1랩만 달려 보기로 결정했다.
아주 오래돼 보이는 하얀색 작은 건물에서 1랩 주행 비용인 26유로를 내고 건네 받는 티켓은 ‘링카드’라고 적혀 있는 신용카드 사이즈의 전자식 플라스틱 카드다.
정해진 5시가 좀 넘어서 게이트가 열리고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하나 둘씩 줄지어 게이트를 향했다. 한 기자와 나는 각각 1랩씩만 달릴 거여서 여유 있게 게이트로 들어섰다.
한기자는 지난 번에 구입한 카드에 아직 1랩이 남아 있어서 그 카드를 입구 판독기에 갖다 대자 차단기가 열렸다. 차단기를 지나고, 놓여 있는 콘을 따라 시케인 구간을 지난 후 본격적으로 주행이 시작됐다. 내 생애 첫 뉘르부르크링 경험은 한상기 기자의 주행에 동승한 체험이었다.
한 기자는 이미 여러 번 뉘르부르크링을 달려 본 경험이 있어서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CLS 350 CDI 슈팅브레이크는 그 동안 한 기자가 링을 달렸던 차들에 비해 월등히 성능이 뛰어난 차라 한 기자도 무척 들뜬 상태로 코너를 파고 들었다. 뉘르부르크링은 수 많은 블라인드 코너와 큰 고저차로 유명한데, 한 언덕을 오르면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자 언덕을 넘으면서 차가 살짝 날기도 했다. 그렇게 한 기자는 신나게 뉘르부르크링을 즐겼다. 처음인데다 그 높은 악명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리자 아까 스파이샷을 찍었던 코너도 지나고, 끝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코너도 마침내 다 빠져 나와 마지막 긴 직선 주로에 도달했다. 테스트 차량이라면 이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겠지만 체험 주행 때는 이 길 끝부분에서 코스를 빠져 나가야 해서, 길 중간 정도 지난 후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렇게 내 뉘르부르크링 첫 동승이 끝났고, 이제 진짜 내 첫 경험이 이뤄질 차례다.
뉘르부르크링 체험 주행은 연속으로 2랩 이상을 돌 수 없고, 반드시 1랩 주행 후 서킷 밖으로 나와야 한다. 주차장으로 돌아 와 잠시 쉰 후 운전대를 잡았다.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 게이트 앞에 도착한 후, 창문을 열고 주차권 발권기와 비슷하게 새긴 판독기에 아까 구입한 카드를 갖다 대자 녹색 불이 들어오고 곧 차단기가 열리면서 드디어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 그린 헬이 내 앞에 열렸다.
차단기를 지나고 앞에 놓인 콘 사이를 천천히 빠져 나간 후, 콘이 끝나는 지점부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코스 레코드를 찍어 보고 싶었지만 마음을 고쳐 먹고 첫 경험을 음미하기로 하고 부드럽게 달렸다. 그냥 꼬불꼬불한 시골 산길이라고 생각하고 달리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주변에 지나는 차도 별로 없어서 ‘아웃 인 아웃’과 ‘슬로우 인 패스트 아웃’을 지키면서 달리기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시로 리어 뷰 미러를 보면서 뒤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차가 없는 지 살펴야 한다. 그런 차가 붙으면 바로 차를 오른쪽으로 붙여서 길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역시 블라인드 코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누군가는 1천 랩 이상을 돌아야 코너를 다 외울 수 있다고 하니 이 곳을 전속력으로 달린 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한 기자가 전속력으로 돌진해서 살짝 날아 올랐던 언덕을 오르면서는 꼭대기 부근에서 엑셀을 놓는 굴욕 아닌 굴욕도 경험하면서 한 코너, 한 코너를 돌았다.
서킷을 달리는 도중에 공사 차량도 발견했다. 이런 위험한 서킷에 차들이 달리고 있는데도 공사차량이 들어와서 그냥 무심하게 서킷 정비를 하고 있는 모습은 참 신기한 장면이었다.
정말 길긴 길다. 보통 1~2분 정도면 1랩을 돌 수 있는 서킷이 대부분인데, 뉘르부르크링은 최고의 전문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로 달려도 7분 정도가 걸리고, 내가 CLS 350 CDI 슈팅 브레이크로 돌면 10분을 훌쩍 넘겨야 한 바퀴를 돌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 그리고 코너 하나하나를 즐기자면 10분도 긴 시간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코너를 지났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이어지는 코너들을 지나다 보니 아까 스파이샷을 찍었던 코너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코너 안쪽을 깊이 파고 들면서 돌아 나간 후 조금 더 달리자 드디어 마지막 직선 주로에 다다랐다. 이 길이 내 첫 경험의 절정이어야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이 길의 절정은 일반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절정의 중반을 지나면서 첫 경험의 황홀함을 뒤로하고 속도는 고개를 숙였고, 천천히 서킷을 빠져 나오면서 12분 간의 내 첫 경험은 막을 내렸다.
첫 경험의 여운이 못내 아쉬워 발길이 잘 돌려 지지 않지만 오늘밤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묵으려면 떠나야 한다. 정문을 떠나면서 링 밖에서 링 주행장면을 볼 수 있는 다른 포인트로 한 기자가 안내했다. 이 곳은 넓은 공터가 있어서 차를 주차해 두고 바로 링을 달리는 차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벌써 많은 이들이 구경하고 있다.
잠시 있으니 코너 너머에서 트럭 한대가 달려 온다. 아니 트럭도 링을 달리나? 아까 공사하던 차인가 했는데 보니 트럭 위에 앞 부분이 상당히 심하게 부서진 BMW E36 M3 한 대가 실려 있다. 체험 주행 때도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한다.
뉘르부크르링 노르트슐라이페 주행을 끝으로 이번 북유럽 투어의 공식적인 일정도 끝이 났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뉘르부르크링을 떠나 이제 처음 투어가 시작됐던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시간이다. 뉘르부르크링에서 나오는 국도는 길이 정말 예뻤는데 주황색을 띄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깔리면서 북유럽 투어 마지막 여로가 따뜻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