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틱 로드에서의 촬영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촬영에 나설 참이었지만 다행히 어제의 촬영은 만족 이상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찾아 간 바로 그 날, 바로 그 시간에 쌍무지개가 뜨고, 빗속을 뚫고 멋진 구름과 빛내림까지 연출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숙소를 몰데에 잡았는데 몰데에서 아틀란틱 로드까지도 거리가 50km 정도 되는 데다 마침 아침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다시 아틀란틱 로드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될 확실한 명분이 생긴 거다.
이번 일정의 최고 미션을 잘 마무리한 터라 아침엔 여유를 부리며 식사를 하고 호텔을 좀 둘러봤다.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피요르드 변에 위치한 하얀색 건물의 호텔은 특급 호텔은 아니어도 건물 디자인이나 인테리어가 전형적인 현대 북유럽의 디자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했다.
호텔 앞에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트들이 여러 대 정박해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호텔 곳곳에 걸려 있는 몰데를 배경으로 한 여러 점의 사진이었다. 몰데 앞으로 흐르는 피요르드에는 길쭉한 3개의 섬이 있었고, 멀리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한 몰데는 상당히 운치 있는 꽤 큰 도시였다.
어렵게 걸음 한 노르웨이, 그것도 꽤 북쪽으로 올라온 몰데인 만큼 마음은 하루 정도 여유롭게 도시를 둘러 보고 싶었지만 이미 예정했던 일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열심히 돌아가는 길을 재촉해야 했다. 오늘 목적지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다. 노르웨이 내륙을 관통해서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몇 번은 페리를 이용해야 한다.
몰데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 길에서 약 20분 정도만 벗어나면 ‘요정의 길’을 볼 수 있어서 잠시 고민했지만, 어제 아틀란틱 로드에서의 촬영에 꽤나 만족한 터라 요정의 길 정도는 포기하고 빨리 길을 재촉하는 쪽을 선택했다. 요정의 길은 스위스에서 이태리로 넘어가는 쪽에 있는 유명한 스텔비오 파쏘처럼 지그재그로 산을 오르는 길이다. 노르에이에서 꽤나 유명한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비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산길을 오른다 하더라도 다시 내려와서 돌아 나와야 하는 길이어서 쉽게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와 함께 산 허리를 감도는 운무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길 좌우로 거대한 바위산들이 흘러간다. 게 중에 하나는 마치 코끼리 같아 보이는 바위도 있다. 바위가 워낙 크다 보니 코끼리 형상이 정말 잘 어울린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고, 야트막한 산들 중턱에는 그림 같은 집들과 잘 다듬은 작은 잔디 정원이 무리 지어 동네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노르웨이 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곳에서 야영장을 만날 수 있는데, 노르웨이는 더 많은 듯 보였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트레일러 그림이나 천막 그림 등이 표시된 표지판을 쉽게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오토 캠핑이나 야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오토 캠핑도 단순하게 자동차를 주차하고 물과 전기만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오두막을 제공해서 옆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자동차와 오두막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곳이 많아 보였다.
오슬로에 가까워져 갈 무렵 꽤 규모가 커 보이는 오토캠핑장 한 곳을 방문했다. 큰 호수 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캠핑장 입구를 들어서자 좌측에 안내소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상당히 넓은 면적으로 캠핑장이 갖춰줘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은 오두막들이 줄지어 지어져 있고, 그 오두막들에는 거의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부분 캠핑객들이 이용중인 것으로 보였다. 이날이 일요일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캠핑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 버스 형태의 캠핑카 앞에 여유로이 앉아 있는 노 부부를 만났다.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 노르웨이의 캠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 부부는 몇 달째 버스 캠핑카로 여행 중이라고 한다. 한 눈에 봐도 버스 캠핑카는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부부도 자신들의 캠핑카가 매우 좋다고 자랑이다.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고는 다시 북유럽의 여유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오슬로 시내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주차에 대해 물어보니 호텔 주차장인데도 역시 주차비를 내야 한다고 한다. 23시간을 미리 지불하는 것이 싸다는 설명에 따라서 주차권 발권기에서 230 크로네, 우리 돈으로 42,000원 정도를 계산하고 주차권을 발급받아 차 위에 얹어 두는 것으로 주차는 해결 됐다. 주차비 역시 살인적이다.
저녁도 먹을 겸, 오슬로 중심부로 차를 몰고 나갔다. 먼저 유명한 현대 미술관 앞 주차장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오슬로 중앙역과 시청 등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슬로에서는 중앙역에서 왕궁까지 이르는 길이 칼 요한슨 거리라고 불리며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한다.
먼저 자동차로 왕궁까지의 거리 곳곳을 대충 둘러 본 후 오슬로 시청 앞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오슬로 중앙역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엔 아무리 둘러 봐도 주차와 관련된 안내가 없고, 주차 요금 계산기도 없다. 여기 저기 둘러 보다 옆 자리에 주차하는 분에게 여기 주차가 무료인지 물어보니 그렇단다. 신기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니 기쁘게 차를 세워두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중앙역 옆 광장에는 사람 키 만한 호랑이 조각이 어슬렁 거리듯 서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사진을 찍곤 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 답게 도심은 잘 정돈되고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분주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이 여유로워 보였다.
중앙역에서 왕궁 방향으로 길을 잡고 가면서 그랜드 호텔 앞에 이르렀다. 오슬로 시청은 해마다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유명하고, 그랜드 호텔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묵는 호텔로 유명하단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호텔 건물 1층에는 그랜드 카페가 있는데, 그랜드 호텔 덕분에 유명하기도 하겠지만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작가 헨리크 입센이 매일 1시에 들렀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단다.
노르웨이에 왔으니 평소 좋아하는 연어를 제대로 먹어 볼 생각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연어를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아직 찾지 못한데다, 그랜드 카페를 그냥 지나치기가 못내 아쉬워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낮 시간에 차를 마시는 손님이 더 많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녁 시간에는 다소 빈 자리가 있었다. 식사는 웨이트리스의 추천을 받아 연어 요리를 주문했다. 가격이 비쌀 것은 메뉴판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어서, 애써 가격을 외면하고 주문을 했다.
소스와 감자를 곁들인 연어 요리가 나왔다. 연어는 아주 맛있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는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닌지라 뭐라 평하긴 힘들었고, 다만 오슬로에 와서, 그랜드 카페에서, 연어 요리를 먹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야 할 식사였다. 요리 가격은 215 크로네, 우리 돈으로 약 3만 8천원 정도다. 무척 비싼 식사 비용을 지불하고 추억 하나를 얻었다.
거리를 좀 더 돌아다니다 주차해 둔 오슬로 중앙역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자동차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혹시나 비싼 주차비나 과태료를 물기라도 했다면 저녁 식사 추억 하나의 값은 더 올라갔을 것이다.
내일은 독일 함부르크까지 갈 예정이다.